고전문학

유리왕 설화와 중국 삼왕묘(三王墓) 전설 비교

noddle0610 2006. 1. 17. 20:58

 

 

     유리왕 설화중국 삼왕묘 전설 비교

 

                                                   박  노  들

 

  고구려 유리왕(琉璃王)의 설화는 김부식(金富軾)이 고려 인종 23년(1145년) 12월에 편찬한 삼국사기(三國史記)권(券) 제(第) 13 고구려 본기(本紀) 제1 유리왕(琉璃王) 조(條)에 수록되어 있습니다.


「삼국사기」이전(以前)의 문헌(文獻)이 모두 소멸되고 후세(後世)에 전(傳)하지 않아, 현재로서는 우리 나라 최고(最古)의 사서(史書)라고 할 수 있는 「삼국사기」에 실려 있는유리왕 설화가 가장 오래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유리왕(琉璃王) 조(條) 첫 머리에 실려 있는 설화 내용은 유리왕의 어린 시절 이야기와 함께 성장 과정에서 아버지가 없는 것을 부끄럽게 여겨 아버지 찾기를 하는 이야기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의 아버지인 주몽(朱蒙)이 부여(夫餘)에서 탈출하여 남쪽으로 갈 때, 유리(琉璃)는 아직 어머니 예씨(禮氏)의 복중(腹中)에 있었는데, 주몽이 탈출 직전에 부인에게 이르기를, 사내아이를 낳거든 그 아이에게 내 신표(信標)를 일곱 모가 난 돌 위 소나무 밑에 감추어 두었으니, 만일 이것을 찾아 낼 수 있는 사람이면 곧 내 아들이요.라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모친에게서 생부(生父)가 남기고 간 수수께끼를 들은 유리는 며칠 동안 산골짜기로 가서 그것을 찾다가 못 찾았는데, 어느 날 아침에 마루 위에 있다가 주춧돌 사이에서 무슨 소리가 들려 살펴보니 주춧돌 위에 일곱 모가 난 기둥을 발견하였으며, 이내 기둥 밑을 찾아서 부러진 칼 한 토막을 얻었고, 부여(夫餘)를 떠나 옥지(屋智) 등 세 사람을 동반(同伴)하여 아버지가 있는 졸본천(卒本川)에 이르러 이미 한 나라의 왕이 되어 있는 부왕(父王) 주몽(朱蒙)을 만나 부러진 칼을 바쳤습니다. 주몽이 자기가 지니고 있던 토막 진 칼을 꺼내 유리가 바친 칼과 맞추어 보니 딱 들어맞아 한 자루의 칼이 되었고, 이에 기뻐하며 유리(琉璃)를 세워 태자(太子)로 삼았습니다.         


  이 유리왕(琉璃王) 조(條)에는 그가 왕위에 오른 후 계비(繼妃)로 맞이했던 두 여인 화희(禾姬)와 치희(雉姬)의 쟁총(爭寵)이 계기가 되어 지어 부른황조가(黃鳥歌)에 얽힌 이야기, 오랑캐 선비족(鮮卑族)의 침입과 그들을 격퇴한 부분노(扶芬奴)장군의 지혜와 무용담(武勇談), 교시(郊豕)의 출현(出現)과 두 신하의 죽음에 얽힌 이야기, 부왕(父王)의 명을 따라 자살한 태자(太子) 해명(解明)의 애화(哀話), 왕자(王子) 무휼(無恤)의 지혜로 부여의 침략을 막은 이야기, 중국(中國) 전한(前漢) 말엽(末葉)에 한때 황제를 참칭(僭稱)했던 왕망(王莽) 군대와의 공방(攻防) 경위(經緯) 등 상당수의 이야기가 수록되어 있습니다. 


  유리왕(琉璃王)에 관한 설화 중 수수께끼 같은 아버지 신표(信標) 찾기 성공담(成功譚)은 그 내용 중 일부가 중국(中國)의 「삼왕묘(三王墓)」전설 내용 일부와 상당히 유사(類似)합니다.  


  칼을 잘 만드는 간장막야(干將莫耶)가 왕명으로 명검을 만들다가 시일이 지체하여, 왕의 노여움을 사서 죽게 되었는데, 이를 미리 감지한 막야는 임신 중인 아내에게 태어날 아기가 사내아이일 경우 전해 달라며 수수께끼 같은 내용을 적은 유서를 남기고는 처형(處刑)을 당하였습니다.

 

   문밖을 나서니 바라보이는 남산(南山).

   남산에 바위 있고 바위에 소나무 있네.

   소나무가 칼을 품었으니 그 칼이 너를 기다리리.

 

  막야가 죽은 후 태어난 아이가 열 살 때, 어미가 병환으로 죽게 되었는데, 임종시 어미로부터 아버지의 유서를 전달 받고, 막야의 아들은 아비를 위해 그 칼을 찾아 복수하겠다는 결심을 합니다. 


  막야의 아들은 아버지의 수수께끼를 풀고자, 고민하다가 무릎을 치며 깨달았습니다.


  마당 앞을 내다보니, 땅위에 주춧돌이 서 있고, 그 위에 큰 소나무 기둥이 서 있었던 것입니다. 도끼를 가져다가 기둥을 깨니, 광채가 나는 칼이 발견되었습니다. 아버지가 왕에게 진상한 칼의 자검(子劍)이었습니다.


  막야의 아들은 그 칼로 왕에게 복수하고자 무술 연마를 하였고, 그 낌새를 알아챈 왕이 천금(千金)의 상(賞)을 내걸고 체포령을 내리자 산중으로 도망쳤습니다. 


  자신의 무력함과 원수 갚을 길이 없어 산중에서 울고 있을 때 어떤 노인이 나타나 막야의 아들에게 연유를 물었고, 막야의 아들은 자초지종을 노인에게 이야기하였습니다.


  노인은 막야의 아들에게 너의 목과 칼을 바치면 대신 원수를 갚아 주겠다는 제안을 하였고, 이 소년은 그의 제의를 받아들여 스스로 목을 잘라 칼과 두 손으로 제 머리와 칼을 함께 노인에게 바쳤습니다.


  노인은 소년의 머리와 칼을 받아 품고 대궐을 찾아가, 죽은 소년의 목을 왕에게 바칩니다. 왕이 기뻐하며 천금상(千金賞)을 내리자, 노인은 비록 죽은 아이의 목이나 그대로 두면 위험하니 큰솥에 물을 끓여 거기에 넣어 함께 끓일 것을 제의 하였고, 이에 왕은 동의하였습니다. 노인이 시키는 대로 소년의 머리를 사흘 낮밤 동안 끓였으나, 그 목이 가라앉지 않고 누군가를 노려보자, 노인은 왕에게 친히 솥 앞에 나아가 소년을 노려보면 왕의 위엄에 의해 그의 머리가 솥 속으로 가라앉을 것이라고 이야기해 줍니다. 


  왕이 솥이 걸려 곳으로 친림(親臨)하여 소년의 머리를 굽어보며 잔뜩 노려보고 있을 때, 노인이 갑자기 가슴에 품고 있던 간장검(干將劍)으로 왕의 목을 자르고, 자신의 머리를 잘라 소년의 머리가 있는 솥에다 던져 넣었습니다.  


  간장막야(干將莫耶)의 아들과 왕, 그리고 노인의 머리, 이렇게 세 명의 머리가 끓는 솥 속에서 서로 엉키어 날뛰다가 모두 풀처럼 용해(溶解)되어 버렸습니다.


  한데 엉킨 채 풀처럼 세 명의 머리가 다 녹아 버리자 어느 것이 왕의 머리인지 구분할 수 없게 되었고, 이에 신하들은 셋을 똑같이 나누어 모두 왕의 예로써 장례(葬禮)를 치러야 했으며, 한 군데다 세 명의 묘(墓)를 나란히 써서, 이 삼묘(三墓)를 삼왕묘(三王墓)라 불렀다고 합니다. 


  이 「삼왕묘」 설화는 1929년 5월에 발행한 「어린이」잡지(제7권 4호)에  실려서 동화(童話)로 우리나라에 널리 알려진 적이 있습니다.


  유리왕의 부러진 칼 찾기 설화는 그 모티프(motif)가 수수께끼를 풀어서 아버지를 찾겠다는 희망적 내용의 설화이나. 삼왕묘 전설에 등장하는 간장막야(干將莫耶)의 아들이 찾는 명검(名劍) 찾기 수수께끼 풀이는 이미 죽은 아버지를 위한 복수가 그 모티프입니다.


  유리왕 설화는 해피엔딩(happy ending)이지만, 삼왕묘 전설의 내용은 비극적(悲劇的) 결말(結末)을 맺고 있습니다.


  유리왕의 설화는 어버지를 만나는 과정을 중심축(中心軸)으로 하는 단선적(單線的) 구조이나, 삼왕묘 전설에는 아버지 복수를 위한 여러 장치(裝置)와 그 장치의 이면(裏面)에는 자기희생(自己犧牲)의 심모(深謀)와 원려(遠慮)가 개재(介在)된 복합적 구조를 갖추고 있습니다. 물론 그 심모(深謀)의 주연(主演)은 유충(幼沖)한 소년 주인공(少年主人公)이 아닌 그를 도와주는 노인이었지만 말입니다.  


  자기의 목을 자르는 희생도 서슴지 않고 감수하는 복수(復讐)의 구조(構造)는 사기(史記)의 기록에도 보입니다. 전국시대(戰國時代) 말기에 진왕(秦王) 정(政)에게 가족을 잃은 후 복수를 위해 절치부심(切齒腐心) 끝에 자기 목을 벤 번어기(樊於期) 장군과 그 목을 들고 연(燕)나라 태자 단(丹)의 명(命)을 받아 진왕을 시해(弑害)하려했던 자객(刺客) 형가(荊軻)의 이야기, 그리고 훗날 천하를 통일한 진시황(秦始皇) 정(政)을 죽이고자 맹인(盲人)이 되는 것조차 감수했던 형가의 친구이자 축(筑)의 명수(名手)인 고점리(高漸離)의 행적(行蹟) 등이 바로 복수를 위해 그 대가(代價)로 자신을 희생하는 대표적 예화(例話)입니다.


  아버지를 찾으려했든 죽은 아버지의 복수를 하려했든 간에, 현재 함께 살고 있지 않은 아버지의 수수께끼 같은 전언(傳言)대로 그들이 남기고 간 칼 찾기를 하는 대목은 「유리왕 설화」「삼왕묘 전설」이 서로 너무 유사(類似)합니다. 


  두 이야기의 구조가 서로 유사(resemblance)한 부분이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보건대, 이를 비교문학적인 관점에서 접근해 본다면 동양문화권(東洋文化圈)이라는 매개적(媒介的) 환경으로 인해 둘 사이에 무슨 계승 관계와 영향 관계가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초한전쟁(楚漢戰爭)을 배경으로 항우(項羽)와 유방(劉邦)이 쟁패(爭覇)하는 이문열 씨의 소설「큰바람 불고 구름 일더니 卷二, 바람아 불어라」편(篇)에도 삼왕묘 설화가 등장하는 것을 보면(동아일보, 2003.04.25 연재 부분 참조), 중국 측 이야기가 고구려보다 먼저 이루어진 것이 틀림없으나, 그보다 나중에 이루어진 것으로 보이는 고구려 유리왕 이야기가 구성의 소박성 등을 감안(勘案)하여 볼 때 오히려 설화의 원형(原型)에 더 가까워 보이므로, 양자(兩者)의 영향 관계를 함부로 속단해 말하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우연한 유사성만으로 영향 관계가 있다고 단정할 수 없는 예(例)는 우리 나라의 콩쥐팥쥐 이야기와 서구(西歐)의 신데렐라 이야기의 유사성도 거론(擧論)할 수 있습니다.


「유리왕 설화」「삼왕묘 설화」처럼 수수께끼 같은 난제를 풀게 하여 어떤 자격(資格) 유무를 시험해 보는 이야기는 신라(新羅)의 소년 최치원(崔致遠)이 수수께끼를 풀어서 중국 황제의 침략을 모면했다는 설화 내용에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고구려가 국가의 형태를 완벽하게 갖추고 문화를 꽃피운 것은 유리왕 사후(死後)인 훨씬 후대(後代)의 일로 보고 있는 바, 과연 고구려 건국 초기에 해당하는 유리왕 대(代)에 한문(漢文)으로 기록된 문헌(文獻)의 영향을 받을만한 토양(土壤)이 보편적으로 마련되어 있었을까 하는 의문(疑問)도 생깁니다.


  유리왕이 부여(夫餘)에서 고구려로 탈출하여 주몽(朱蒙)의 태자(太子)로 뒤늦게 인정받은 사실은 주몽의 또 다른 왕자였던 비류(沸流)와 온조(溫祚)의 남하(南下)와 백제(百濟) 건국 사실을 보더라도 거의 틀림없는 역사적 사실 같습니다.


  주몽이 임신(姙娠) 중인 부인(夫人) 예씨(禮氏)와 후일을 기약하고 남쪽으로 망명(亡命)할 때, 혹여(或如) 아들이 태어나면 장차 서로 알아보기 위해 신표(信標)를 나누어 갖고 헤어졌을 개연성(蓋然性)은 충분히 있습니다. 삼왕묘(三王墓) 전설의 영향이 아닌, 어릴 때부터 활과 칼에 의존해 생활했던 주몽의 입장에서는 임신 중인 아내를 둔 채 급박(急迫)한 상황에서 이산가족(離散家族)의 처지가 되자 무인(武人)답게 훗날의 상봉(相逢)에 대비해 자연발생적으로 칼을 신표(信標)로 삼을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수록되어 있는 또 다른 설화가실(嘉實)과 설씨녀(薛氏女)이야기에도 가실(嘉實)이 설씨녀 부친(父親)을 대신하여 군역(軍役)에 나아갈 때 신표를 나누는 이야기가 나오는 것으로 보아, 옛 우리 조상님들은 피치 못할 사정으로 식구들이나 연인과 헤어질 때 자신의 분신(分身)과도 같은 물건을 둘로 나누어 신표로 주고받는 일이 아주 흔했던 것 같습니다. 


  파경(破鏡)이란 말의 어원(語源)은 예전에 남녀가 피치 못할 사연으로 헤어질 때 후일을 기약하며 동경(銅鏡)을 깨어 나누어 갖은 일에서 생겨났다고 합니다. 재회(再會)를 약속하며 그 때의 신물(信物)로 나누어 갖은 파경(破鏡)이 세월이 흐른 후 양인(兩人)이 상봉(相逢)할 때 서로 갖고 있던 구리거울 조각이 하나로 부합(符合)하면 본인(本人)이 틀림없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는 거지요. 오늘날은 유리거울을 사용하고 있는 시대라서 그런지 파경(破鏡)이란 말을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하고 있는데 반(反)해, 구리거울을 사용하던 고대(古代) 사람들은파경이란 말을 재회(再會)를 기약하는 희망적 의미를 지닌 말로 사용하였던 같습니다. 


  어쨌거나, 칼을 신표로 남긴 중국인 간장막야(干將莫耶) 이야기와 고대 우리나라 사람들이 흔히 사용한 신표(信標) 중 하나인 칼을 사용했을 뿐인 고주몽(高朱蒙) 부자(父子)의 이야기가 양자(兩者)의 칼 찾기 과정이 유사(類似)하다고 해서, 서로 어떤 영향-계승 관계를 맺었다고 추정(推定)할 수는 없으며, 우리 겨레는 수수께끼를 즐기는 민족인데 유독 「유리왕 설화」만 따로 떼어내어 「삼왕묘」이야기의 영향을 받았다고 볼 수도 없는 일이므로, 고구려 「유리왕 설화」와 중국 「삼왕묘 전설」 두 이야기의 부분적 유사성이 어떤 관계인지는 앞으로 좀더 학문적 천착(穿鑿)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설혹(設或) 양자(兩者)가 영향 계승 관계에 놓여 있진 않았다고 할지라도, 그 유사성에 대한 비교문학적 연구는 상당히 필요할 것 같습니다. 차제(此際)에 한문(漢文)과 불교(佛敎)의 도입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기 이전(以前)이었던 삼국시대 초기 양국(兩國) 문화의 특성을 알아볼 수 있는 한 올의 작은 실마리가 풀릴 수도 있을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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拙稿(한림학사 : ID), Daum Portal site 신지식 홈,학문, 전공>인문학>국어국문학 , 2005-11-03 01:52 搭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