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그리운 내 고향

민물고기 사진 유감(有感)

noddle0610 2015. 7. 28. 09:05

 

 

민물고기 사진 유감(有感)

 

 

 

 

 

 오래간만에 고향의 국민학교[初等學校] 동창회에서 운영하는 인터넷 카페(internet cafe)에 들어가 보았더니 반가운 사진 한 장이 눈에 띈다. 한 후배가 눈먼 고기라는 제목의 글을 실었는데, 민물에서 갓 잡은 누치를 비롯해 ()고기여러 마리를 양동이[bucket]에 소담히 담아 놓은 사진이다 

 

 이 눈먼 고기라는 사진을 보노라니 불현듯이 저 1950년대의 초등학교 재학 시절이 떠올랐다.   

 

 강원도 영서지방(嶺西地方)을 관통하는 소양강(昭陽江기슭에서 태어나고 자란 나는 ‘6.25 사변으로 인해 유년시절(幼年時節)을 남도지방(南道地方) 피란지(避亂地)에서 보내고 1954년에 고향 상수내리(上水內里)로 돌아와 국민학교를 다녔다. 처음에는 춘성군(春城郡) 북산면(北山面) 수산리(水山里)에 있는 수산국민학교(水山國民學校)라는 곳을 다니다가 고향마을의 행정구역 소속이 바뀌는 바람에 양구군(楊口郡) 남면(南面) 상수내리(上水內里)에 새로 생긴 수내국민학교(水內國民學校)를 다니게 되었는데, 춘성군(春城郡)에 있던 학교를 다닐 때는 학교의 위치가 바로 우리 집에서 경작하던 논밭 가까이에 있어서 낯설지가 않았지만 새로 옮기게 된 학교는 나룻배를 타고 소양강을 건너 난뿌리(蘭根洞)이라고 하는 곳에 있었기 때문에 처음에는 학교 가기를 매우 싫어했다. 

 시퍼런 강물도 싫었고, 흔들거리는 나룻배를 타는 것도 싫었으며, 새로 옮기게 된 학교는 번듯한 건물이 아닌 이른바 천막학교(天幕學校)였기 때문에 더더구나 싫었다.

 자고이래(自古以來)로 우리 마을은 양구군(楊口郡) 소속이었는데,8.15 해방이후 우리나라가 남북(南北)으로 분단되는 바람에 양구군에서는 우리 동네만 유일하게 대한민국 땅으로 남았고 나머지 마을들은 전부 다 삼팔선(三八線)이북(以北)에 위치해 있어서 북한(北韓)의 땅이 되고 말았다. 6.25 동란이 끝날 무렵 양구군의 대부분이 대한민국 영토로 수복(收復)이 되자 우리 마을은 춘성군 소속에서 양구군으로 다시 복귀하게 되었고, 부득불(不得不) 나는 강제적으로 춘성군 소속의 학교를 떠나 양구군 소속의 천막학교로 가야 했던 것이다.  새 학교에는 수산국민학교 출신은 물론이요, 이웃 마을이었던 인제군(麟蹄郡) 남면(南面) 어론리(於論里)에 있던 어론국민학교(於論國民學校)와 신남리(新南里)에 있던 부평국민학교(富坪國民學校) 및 북한(北韓)의 다스림을 받았던 학교 출신들이 섞여 있어서 서로들 물과 기름 사이처럼 융화하지 못하고 데면데면하게들 지내고 있었다. 상수내리(上水內里), 하수내리(下水內里), 원리(院里) 이렇게 세 개 마을의 학생들을 한데 모아 그 중립 지대에 새로 설립한 학교이긴 했지만 그 이전에 다니던 학교에 대한 그리움 때문에 출석률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전쟁 때문에 학령(學齡)이 훨씬 지나가 버린 나의 재종형(再從兄)은 자기 또래의 친구들과 함께 원래 다니던 어론국민학교(於論國民學校)를 졸업하고 신남중학교(新南中學校)에 입학했다. 여담(餘談)이긴 하지만 훗날 신남중학교 1년 선배가 된 나의 재종형(再從兄)은 중학교 졸업하고 얼마 안 가서 징집연령에 이르게 되자 육군에 입대하였고, 나의 신남중학교 동기생(同期生상당수 또한 육군에 입대하였다. 서울에서 고등학교를 다닐 때 나는 베트남(Vietnam) 전선(戰線)에 파병되어 간 중학교 동기생 친구들에게 위문편지를 자주 부쳐야 했고, 이런 나를 서울의 고등학교 동창들은 무척 신기하게 여기곤 했다.   

 전쟁으로 인해 학령이 초과해 버린 초등학교와 중학교 동창생들, 거기다가 삼팔선(三八線) 일대(一帶)에서 태어나고 자란 내 동창생들 중 상당수는 새로 호적(戶籍)을 꾸미는 과정에서 실제 나이가 훨씬 줄어드는 바람에 동기생끼리의 나이 차이가 적게는 한두 살에서 크게는 예닐곱 살 내지(乃至) 여덟 살까지도 벌어지는 경우가 있었다. 그래서 현재 나의 수내국민학교와 신남중학교 동기생들 가운데 상당수는 이미 70대 중반의 나이를 훌쩍 넘기고 있는 중이다. 나 또한 호적과 실제 생년월일(生年月日)이 일치(一致)하지 않지만, 내가 고등학교를 다닐 때 이미 군대에 간 친구 상당수에게 위문편지를 보낸 가슴 아픈 경험이 있기에 그들과 비교해 조족지혈(鳥足之血)에 해당되는 나는 서울의 친구들 앞에서 내 실제 생년월일을 가급적 밝히지 않으려 한다. 그들이 38과 같은 경계선 지역에서 살아본 경험이 없고, 전쟁의 참상으로 인해 모든 것이 파괴되어 모든 것을 새로 다시 시작해야 했던 경험이 없는데, 그런 사람들에게 긴 시간에 걸쳐 나의 인적 사항(人的事項)을 일일이 구차하게 설명하기가 싫고 귀찮은 것이다            

 

 그건 그렇고…….

 

 나는 19544월에 처음으로 입학한 수산국민학교에선 잘 적응을 하였지만, 1955년도에 이르러 행정구역 변경 때문에 새로 옮겨 가게 된 학교에서는 잘 적응을 하지 못해 결석이 잦았다. 그래서 1955년에는 학교에다 이름만 걸어놓았을 뿐이었고 1956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학교를 제대로 다니게 되었다. 그동안 집에서 서당방을 경영하시던 할아버님으로부터 싸리나무 가지를 잘라 만든 회초리로 종아리를 맞아 가면서 《천자문(千字文)》을 깨우쳤고《무제시(無題詩)》《동몽선습(童蒙先習)》《계몽편(啓蒙篇)》과 《명심보감(明心寶鑑)》을 떼고 《소학(小學)》까지 배우고 익히면서 할아버님의 엄하신 가르치심과 어머니의 감시에서 벗어나려는 발칙(?)한 생각을 하게 된 나는 그 해방구(解放區)로써 천막학교를 선택한 것이다. 

 

 야전(野戰)에서 사용하는 군사용 텐트(tent)로 세운 천막학교는 여름철이면 그 안의 온도가 온통 찜통더위로 상승해 가고 있었기 때문에 맑은 날씨에는 주로 학교 뒷산에 올라가 산기슭의 소나무 가지에 칠판을 걸어 놓고 수업을 했고, 궂은 날씨와 추운 날씨에는 천막 안에서 볏짚으로 엮은 쌀가마니를 깔아 놓은 교실 바닥에 양반(兩班)다리를 한 채 앉아 책걸상 없이 공부를 해야 했다. 4학년 이상의 상급생들은 숫자가 많지 않았기 때문에 각자 책상 삼아 사과궤짝을 하나씩 앞에 놓고 공부를 할 수 있었지만, 1~3학년 학생들은 책상도 없이 맨바닥에 앉아 공부를 해야 했고 글씨를 쓸 때는 엎드린 채 몽당연필에 침을 묻혀 가며 부자연스러운 자세로 글씨를 써야 했다. 오히려 나의 할아버님이 경영하시는 서당방(書堂房)의 학동(學童) 형님들은 비록 대청 마루에 앉아 공부를 하긴 했지만 오동나무나 소나무를 깎아서 만든 일종의 책상인 서안(書案)을 각자 하나씩 앞에 놓고 그 위에 책을 펴놓은 채 공부를 하였고, 글씨를 쓸 때도 몽당연필이 아닌 족제비 털로 만든 붓에다가 먹을 듬뿍 묻혀서 역시 오동나무나 소나무로 반질반질하게 기름을 먹인 분판(粉板)에다가 글씨를 쓱쓱 써내려 갔다. 할아버지의 싸리나무 가지로 만든 회초리가 무서워 천막학교를 택하긴 했지만 학습환경은 우리 집 서당방이 훨씬 나았다.  학교에서는 2(二個) 학년이 한 천막 속에 들어가 복식 수업(複式授業)을 했는데, 나는 사과궤짝을 하나씩 차지하고 앉은 6학년 형()들을 매일매일 부러워하며 공부하였다.

 

 1950년대 당시만 해도 산간벽지(山間僻地)의 선생님들은 정규(正規) 사범학교(師範學校) 출신은 거의 드물었고임시 교원양성소에서 단기간(短期間) 동안 강습을 받고 준교사(準敎師) 자격을 획득한 분들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지금 회고하건대 그때의 학교 수업은 대충대충 가르치는 식이었다. 예컨대 당시에는 3학년 셈본[算數]시간에 구구단(九九段)을 배우고 익혔는데, 그날 배운 구구단 한 단계를 외운 학생은 일찍 집으로 보내 주곤 했으며, 국어 시간에 글자를 한 자(字)도 틀리지 않고 읽은 학생 또한 먼저 하교(下校)를 시키는 식() 따위였다. 서당방 훈장(訓長)이신 할아버님과 서당방 접장(接長) 형님으로부터 한글을 똑 부러지게 배우고 익힌 나는 그 덕분에 거의 매일 친구들보다 일찍이 두꺼운 천막을 젖히고 재빨리 하교(下校)를 하곤 했다. 

 

 남보다 일찍이 학교를 마친 나는 더운 여름날이면 소양강을 나룻배로 건너가기가 무섭게 옷을 바위 틈 사이에 벗어 놓고 강물에 뛰어 들어 미역을 감으며 놀곤 했다. 그런데 그 재미가 여간 쏠쏠한 게 아니었다.

 

 어떤 날은 한참 미역을 감고 노는 중에 저 멀리 소양강 상류의 신월리(新月里) 마을 쪽에서 천지를 뒤흔드는 굉음(轟音)이 들리곤 했는데, 그럴 때마다 도도하게 흐르던 강물 수면(水面) 위로 갑작스레 물줄기 하나가 ()오름 현상처럼 하늘로 치솟곤 하는 거였다. 그 광경이 아주 볼만하였다.  우리 고향 인근에 주둔해 있던 육군 3군단(三軍團) 소속 장병(將兵)들이 물고기를 잡으려고 일부러 강물 속에 다이너마이트(dynamite)를 터뜨린 것이다. 물론 오늘날은 불법으로 되어 있지만 당시만 해도 물고기 남획이니 수자원 보호이니 하는 개념이 정립되어 있지 않은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의 자유당(自由黨) 정권 치하(治下)였으므로 자주 군인들이 공병대(工兵隊)에서 공사 현장(工事現場) 발파용(發破用)으로 쓰던 다이너마이트를 유출시켜 강물에서 고기잡이에 사용하곤 했던 것이다.  어떤 때는 군단 소속 포병부대에서 보존기간이 지난 포탄을 처리하기 위해 물고기도 잡을 겸해서 강물 속으로 포사격(砲射擊)을 실시하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많은 양의 민물고기가 폭발 소리와 더불어 공중으로 치솟은 물줄기의 영향으로 떼죽음을 당해 수면 위로 부상(浮上)해서 소양강 하류(下流)를 향해 흘러 내려오곤 했다. 잉어, 누치, 메기, 동자개(빠가사리), 쏘가리, 황쏘가리, 모래무지, 퉁가리, 쉬리(쉐리), 버들치, 기름종개 등등 말이다

 또 어떤 때는 민간인들이 민물고기를 잡기 위해 독한 약초(藥草) 뿌리를 대량으로 캐어다가 돌에다 짓찧어 우리 고향의 상류 신월리소여울쯤에서 강물 속에 풀었는데, 그 결과 많은 강물 고기가 죽어서 우리 동네 쪽으로 흘러 내려오곤 했다

 

 다이너마이트 폭발 또는 노후화 되거나 불량화된 포탄들이 터질 때, 아니면 독한 약초를 강물에 뿌렸을 때 죽은 많은 물고기들은 애초 원인을 제공한 사람들은 물론이거니와 소양강 하류에 살던 우리 동네 어른들이 전부 건져 냈으며, 그 양()은 각자 큰 부대(負袋) 자루나 볏짚가마니로 가득가득 담아 자기 집에 가지고 갈 정도였다.  그 여파(餘波)로 아직 어린 나이였던 국민학교 학생들도 미역을 감다가 말고 이게 웬 떡이고 웬 횡재냐 하며 물 위로 둥둥 떠내려 오는 물고기들을 건져 내어 자기들 집으로 가져 가곤 했다. 이런 일들이 여름철이면 자주 생겨서 어떤 아이들은 아예 자기 집에서 싸리나무 가지로 엮은 다래끼(바구니)를 가져 와 바위 틈에 숨겨 두었다가 꺼내어 물고기를 수습(收拾)하기도 했다. 

 어른들의 불법적인 어로행위(漁撈行爲) 덕분(?)에 나는 난생처음으로 잉어와 누치 생선 맛을 실컷 맛볼 수 있었으며, 그런 행위가 당시에는 불법인지 자체도 모르던 시절이라 해마다 여름철이 오면 6학년 졸업할 때까지 소양강에서 수영을 하다가 강물 가득히 떠내려오는 잉어와 누치 따위를 건져서 집으로 가져갔고 어머니로부터 칭찬을 듣기도 했다. 우리 할아버님께옵서 잉어매운탕누치매운탕을 좋아하셨고, 잉어나 누치로 장조림을 만들어서 밑반찬으로 잡수시는 것도 좋아하셨기 때문이다. 특히나 어머니께옵서는 잉어를 펄펄 끓는 물에 폭 고은 후에 삼베 조각으로 짜낸 후 그 물을 마시면 시력(視力)에 좋다고 해서 나에게 그렇게 먹이기도 하셨다.  그 효과를 보아서인지는 모르나 나는 고희(古稀)의 나이가 바로 코앞에까지 다가온 지금도 극장에 가서 외국영화를 관람할 때 안경을 안 쓰고서도 능히 자막(字幕) 글씨를 읽어 낼 만큼 시력이 좋은 축에 속한다.  환갑(還甲) 나이 때까지만 해도 돋보기 안경을 안 쓰고서도 국어사전이나 영어사전의 낱말 풀이들을 술술 읽어 내기도 하였다.

 

 어린 시절 학교를 파()하고 집으로 오는 길에 여름철이면 소양강에서 해 저무는 줄도 모르고 미역을 감을 수 있어 신명 났고, 강마을에 사는 사람들만의 특권으로 잉어와 누치 따위를 비롯한 여러 종류의 민물 생선들을 실컷 맛볼 수 있었으며 이에 곁들여 몸보신(-補身)에 좋다는 다슬기(강원도 영서지방 사투리 : 골뱅이)’까지도 풍부하게 구할 수 있어 좋았고, 강원도 특유의 긴긴 겨울철에는 꽁꽁 얼어붙은 강물 위에서 스케이트와 썰매를 한겨울 내내 진절머리가 나도록 탈 수 있어서 너무나 너무나 좋았다. 이런 좋은 점들 때문에 처음엔 학교 가기를 싫어하던 나였지만 차츰 학교 가기를 좋아했고, 4학년 때부터는 전교 1등을 단 한 번도 놓친 적이 없을 만큼 학교 생활에 완벽히 적응하여 졸업할 때는 강원도 도지사상(道知事賞)을 받기도 하였다.

 해마다 봄이면 수내국민학교앞에 펼쳐진 강변(江邊) 여기저기에 해당화(海棠花)가 아름답게 만발하였고, 가을이면 강변 여기저기에 억새(강원도 영서지방 사투리 : 갈대)가 멋들어지게 우거져 그 사이에서 나는 아름다운 꿈을 꾸고 정서(情緖)를 키울 수 있었다.

 

 팔자(八字)가 기구(崎嶇)한 여인(女人)의 운명처럼 파란곡절의 역사를 지닌 나의 고향 상수내리마을은 애초에 양구군(楊口郡)에 속해 있다가 해방 이후 남북분단의 여파로 춘성군(春城郡)에 속하게 되었고, 휴전협정 체결 이후 다시 양구군으로 복귀했다가 1970년대 초에 소양강에 다목적댐(多目的 Dam)이 준공되어 마을의 대부분이 수몰(水沒)되는 바람에 다시 행정구역이 바뀌어 지금 현재의 행정구역은 인제군(麟蹄郡) 남면(南面)에 속하게 되었다.  이제는 마을의 자취가 물속으로 영원히 사라져 버리고 고향 어르신들을 비롯해 마을 사람들이 팔도강산(八道江山)으로 흩어져, 그리운 예전 풍물(風物)들과 인정(人情)들을 꿈속에서나 만나 보는 상상(想像) 속의 마을상수내리가 되어 버렸다.

 그래서 요즘에는 고향과 관련된 사진과 글, 고향과 비슷한 정경(情景)을 담은 그림들만 보아도 눈물을 자꾸 흘리게 된다. 나이 먹고 고황지질(膏肓之疾)에 걸려들어 벌써 여러 해 동안이나 고향 선영(先塋)에 성묘(省墓)를 못 하였다. 자동차를 탈 수가 없어서 고향 후배들의 모임인 동창회에도 못 가고 말이다.  

 비록 고향에는 못 가지만 평소 나의 후배들이 가꾸어 놓은 인터넷 카페에는 가끔씩 들어가서 향수를 달래곤 한다.

 

 오늘 오랜만에 국민학교 시절의 동문들이 운영하는 인터넷 카페에 들어가서 반가운 민물고기 사진을 보고 있노라니 1950년대 어린 시절 겪었던 온갖 아름다운 추억들이 주마등(走馬燈)처럼 떠올려지며 잠시나마 행복감(幸福感) 잠길 수 있었지만, 오호(嗚呼)!…… 이제는 그 어린 시절로 다시 돌아갈 수 없다는 안타까움 때문에 지금 이 순간 내 마음은 시나브로 수수(愁愁)로워져 간다.  

  

2015 7 28

 

         

 

  사진 출처 :  Daum 카페 '수내국민학교 동문들의 사랑방' 자유게시판

                     (눈먼 고기 : 장규홍-을미년 0721) 14373497633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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