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그리운 내 고향

아! 그리운 소양강(昭陽江) 옛 나루터 풍경

noddle0610 2017. 7. 24. 03:15




아! 그리운 소양강(昭陽江) 옛 나루터 풍경

 

오늘 모처럼만에 제가 다녔던 초등학교 동창회의 인터넷 카페(internet cafe)를 방문했다가 요즘에는 보기 드문 아주 귀한 흑백사진(黑白寫眞한 장을 발견했습니다. 


1960년대 후반, 그러니까 약 반세기(半世紀) 전에 나룻배를 탄 13 명의 모교 후배 소녀들이 카메라(camera) 앞에서 제법 자연스레 포즈(pose)를 취한 사진을 보고, 저는 감개무량해서 한동안 말을 잃어야 했습니다. 오늘날에는 좀처럼 목격하기 드문 정경(情景)을 담은 사진이기 때문입니다.


우선 먼저 눈에 띈 것은 소녀들이 타고 있는 나룻배의 형태가 21세기에 들어와서는 거의 사라진 나무배[木船]라는 점입니다. 물론 사진 속에 보이는 목선(木船)의 모습은 1950년대에 저희 또래가 타고 다니던 배의 앞부분과 뒷부분 즉 선수(船首)와 선미(船尾)()이 진 형태와 다소 다르게 유선형(流線型)이긴 했지만 전체적인 느낌상 저 같은 꼰대’들의 향수(鄕愁)를 달래 주기에 아주 충분했습니다.



예전에 제 또래가 타고 다닌 나무배는 우리 마을 최고의 목수(木手) 어르신이 우리 마을 산에서 손수 벌목(伐木)한 나무를 ‘도끼’나 ‘내릴톱’ ‘동가리톱’ ‘거도(鋸刀)’ 따위의 톱으로’ 자르고 켠 연후(然後)에 ‘자귀’ ‘까뀌’ ‘대패’ ‘끌’ 등 ‘연장(연모)’을 사용해 목재(木材)를 정성껏 깎고 다듬었으며, 배를 만들 ‘널판’들이 다 준비되면 ‘끌망치’ ‘장도리’ ‘쇠도리’ 등 그 쓰임새가 각기 다른 ‘망치’들을 사용해 ‘조선못’ ‘민자못’ ‘정(丁)자못’을 비롯한 크고 작은 여러 종류의 못들을 널조각에 박고 연결해 차츰차츰 나룻배의 꼴을 만들어 나갔는데, 배가 완성되기까지는 상당히 오랜 시일이 걸렸습니다. 저는 ‘6.25 전쟁이 끝난 지 얼마 안 되어 국민학교 하급생(下級生)이었을 적에 소양강(昭陽江) 기슭에서 목수 어르신과 뱃사공 아저씨, 그리고 일을 거들어 주는 어른들이 비지땀을 흘려 가며 나룻배를 만들던 과정을 구경했던 기억이 지금도 가끔씩 새록새록 떠오르곤 합니다.  


오늘날에는 전국 어디를 가더라도 목선(木船) 구경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처럼 어렵습니다. 지금은 강물이나 댐(dam), 저수지, 호수 위에 유람선이나 여객선 같은 큰 배들 말고도 알루미늄(aluminium)이나 쇠붙이 종류, 플라스틱(plastic)을 주재료(主材料)로 한 작은 배들이 대부분 떠다니고 있고, 그것도 십중팔구(十中八九)는 발동기(發動機)가 장치되어 있는 이른바 통통배들이 굉음(轟音)과 함께 물보라를 일으키며 수면(水面) 위를 누비고 있는 형편입니다.


   

 13 ()의 소녀들이 타고 있는 나룻배는 놀잇배도 아니고, 여객선이나 화물운반선이 아닌 그저 강 건너에 학교에 가기 위한 단순한 통학용(通學用) 배로서 작금(昨今)에는 대부분의 강에 다리가 놓여서 거의 보기 드물어진 정경(情景)이기에, 더더욱 저는 색깔이 바래진 흑백사진 속의 소녀들과 그들이 타고 있는 자그마한 나무배의 간당간당(?)해 보이는 모습에서 불현듯 애틋한 향수(鄕愁)를 느끼며, 학창시절을 곰곰이 회상해 보았습니다.


  제 모교(母校) ‘수내국민학교(水內國民學校)’는 ‘상수내리(上水內里)’와 ‘하수내리(下水內里)’ 마을의 중간 지점인 ‘난뿌리[蘭根洞]’라는 곳에 세워졌는데, 그 정확한 위치는 영어(英語) S’자형(字形)으로 흐르던 소양강의 중간 지대였기 때문에 두 마을 학생들은 자기 동네 나루터에서 나룻배를 타고 노선(路線)이 다른 소양강을 건너 ‘난뿌리[蘭根洞]’에 있는 학교를 다녀야 했습니다. ‘상하수내리’ 말고도 ‘원리(院里)’라는 곳에서 살면서 학교를 다니는 아이들도 있었는데, 그들은 ‘원리’ 앞을 흐르던 소양강을 건넌 다음에 다시 ‘하수내리’ 앞을 흐르던 소양강을 나룻배를 타고 건너 매일매일 고생고생(苦生苦生)해 가며 학교를 다녀야 했습니다.

 

  매일 아침 학생들이 학교에 가기 위해 나루터에 모이면, 학생들은 일제히 합창을 하듯 목에 힘을 주어 큰소리로 뱃사공 아저씨를 불렀습니다.


“배 건네주세요!……

아저씨, 배 건네주세요! ……


한 두 명의 아이들이 소리치면 뱃사공 아저씨는 꿈쩍도 안 했습니다. 적어도 열 명 정도의 아이들이 모여야 어슬렁어슬렁 나타나시곤 했습니다.


사공 아저씨가 이쪽 마을의 당신 집에 계시는지, 아니면 이미 배를 건너가셔서 저쪽 마을 움막집에 계시는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에 아주 큰소리로 배를 건네게 해 달라고 외쳐야 했습니다.


요즘처럼 한여름에 날씨가 바싹 가물어 강물의 양이 크게 줄어들면 오늘 본 흑백사진 속의 1960년대 말기의 소녀들처럼 아이들이 직접 삿대질을 해서 배를 건네기도 했습니다. 그러다가 사공 아저씨한테 걸리면 아주 크게 혼쭐나기도 했지요.


가뭄 때가 아니면 물의 수량이 많고 물길이 세차서 아이들이 삿대질을 할 수는 없었고, 사공 아저씨가 반드시 직접 삿대질로 아이들을 강 건너편으로 데려다 주셨습니다. 사공 아저씨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사시사철 나룻배에 올라 삿대질을 하셨기 때문에 팔뚝의 근육이 장난 아닐 정도로 울퉁불퉁 굵었습니다.


삿대질이 너무 힘든 일이었기 때문에 제가 학교를 졸업하기 전에 사공 아저씨는 배질(뱃사공 일)을 그만 두셨고,그 대신 제 친구의 형()이 사공이 되어 우리들이 졸업할 때까지 배를 건네주곤 했습니다.


매일 학교를 파()하고 집으로 돌아올 때도 저희들은 아침에 등교할 때처럼 학교 근처 나루터에 모여, 사공을 향해 큰소리로 배를 건네줄 것을 요구하곤 했습니다.


배 건네주세요!……

아저씨, 배 건네주세요! ……

아저씨, 배고파요. 배 건네주세요! ……

배고파 죽겠어요. 빨랑빨랑 배 건네주세요! ……

   아저씨, 아저씨! 배 좀 건네주세요! ……


지겨운 공부를 다 마치고 집으로 가는 길이었기 때문에 아이들의 떼창(-)’ 소리는 오히려 아침보다 더 컸습니다.


  여름에는 해가 길기 때문에 뱃사공이 올 때까지 옷을 훌렁 벗어 갯돌 틈바구니에 감추어 두고 강물에 뛰어들어 신명 나게 ‘미역()’을 감았습니다. 뱃사공이 우리들을 건너편에 데려다 주시면, 우리들은 배에서 뛰어내리기가 무섭게 다시 옷을 벗고 강물에 뛰어들어 ‘미역 감기’를 계속하거나 아니면 친구들끼리 편(便) 가르기를 해서 ‘수영 시합(水泳試合)’을 했습니다. 남자 아이들은 강물이 비교적 깊은 곳에서 ‘수영(水泳)’을 했고, 여자 애들은 남자 애들이 있는 곳에서 한참 떨어진 곳에 가서 ‘멱’을 감곤 했습니다.  제가 국민학교를 다니던 1950년대 그 시절, 저를 비롯한 시골 아이들에게 수영복(水泳服) 따위는 애당초 그 존재조차 알려지지 않았던 시절이라, 우리는 팬티(panties)조차 입지 않은 채 강물에 뛰어들어 해가 뉘엿뉘엿 질 무렵까지 헤엄을 치곤 했습니다.


  그 시절 소양강 상류에서는 가끔씩 몰지각(沒知覺)한 어르신들이 자유당(自由黨) 치하(治下)의 군대(軍隊)에서 유출(流出)시킨 다이너마이트(dynamite)를 물 속에다 터뜨려 그 소리에 놀래 죽은 물고기떼를 대량으로 건져 내어 잡는다든가, 아니면 독()한 약초(藥草) 뿌리를 펀펀한 바윗돌 위에서 진액(津液)이 나올 때까지 돌이나 망치 따위로 짓찧어 그 추출액(抽出液) 전부를 강물에 뿌리곤 했는데, 그 결과 뻣뻣이 뒤로 나자빠진 채 수면(水面) 위로 둥둥 떠오른 잉어, 누치, 메기, 동자개(빠가사리), 쏘가리, 황쏘가리, 모래무지, 퉁가리, 쉬리(쉐리), 버들치, 기름종개등등 엄청나게 많은 민물고기들을 불법(不法)으로 잡았습니다. 그 당시(當時), ‘불법 어로행위(漁撈行爲)’가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전혀 몰랐던 철부지 초딩생(^-^*) 아이들은 강물에서 멱을 감다가 상류(上流)에서 떠내려온 죽은 물고기들을 보고 환호작약(歡呼雀躍)하며 건져 내어 집으로 가져가기도 했습니다. 집으로 가져간 물고기들은 대부분 푸짐한 매운탕거리나 장()조림 재료로 쓰였는데, 어른들께서 아주 좋아하셨습니다. 

  

  이런저런 추억들을 간직하게 한 소양강 옛 나루터와 나룻배 풍경(風景)을 우연히 인터넷 카페에 흑백사진 한 장을 통해서 보게 되니, 지금은 ‘소양강댐(昭陽江dam)’ 속으로 1970년대 초에 영원히 사라져 버린 우리 고향 마을 ‘상수내리’와 모교(母校) ‘수내국민학교, 그리고 여름 내내 소양강에서 함께 물장구치며 뛰놀았던 옛 친구들이 새삼스레 그리워져서 저도 모르게 가슴이 울컥해지는 것을 느낍니다.


사진 속에 나오는 13 인의 소녀들은 저와 함께 학교를 다니진 않았기 때문에 한두 명을 빼놓고는 모두 모르는 후배님들이지만, 저와 함께 학교를 다닌 1950년대의 여자 친구들 때와 거의 비슷하게 정서적으로 아주 친숙한 느낌을 주는 수수한 옷차림, 과히 꾸미지 않은 소박한 머리 모양새에다가 강원도 사람 특유의 순박함이랄까 수줍음이 몸에 밴 모습까지 엿볼 수 있어서 오랜만에 저의 가슴이 따뜻해지는 것을 느꼈답니다.


그나저나 1970년대 초반에 완공된 소양강댐(昭陽江dam) 때문에 고향 마을이 송두리째 사라져서 지금은 흑백사진 속의 나룻배가 오가던 장소에 가 볼 수도 없고, 뱃사공 아저씨를 일제히 떼창(-)’으로 불러내어 다 함께 나룻배 타고 건너면서 추억을 만들고 꿈을 키웠던 우리 동네 친구들도 전국 산지사방(散之四方)에 흩어져서 이제는 거의 볼 수 없게 되었으니, 저로서는 지금 이 순간 인생무상(人生無常)’이란 사자성어(四字成語)의 그 속 깊은 의미를 실감(實感)하지 않을래야 않을 수가 없습니다.      


! 소양강, 소양강댐이 생기기 이전의 소양강 본디 모습이 그립습니다. 통통배가 아닌 나룻배를 뱃사공이 애오라지 삿대질로만 건네주던 옛 소양강 강나루에 다시 가 보고 싶습니다  

 


2017 7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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