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교유록(交遊錄)

오호(嗚呼), 친구여

noddle0610 2016. 2. 16. 18:30

 

 

 

 

 

 

          [추모 시조]

  

오호(嗚呼), 친구여 

전((중앙일보 기자 강창갑 군()

부음(訃音)을 듣고서

 

 

1

 

          스무 살 푸른 시절

          대학에서 만난 친구

 

          그 후로 오십 년을

          바람처럼 보냈나니.

 

          벗님아! 다음 세상엔

          큰 강물로 오시게.

 

2

 

          간다는 말도 없이

          홀연히 떠난 님아.

 

          무던히 부지런히

          바쁘게 살더니만

 

          무엇이 그리 급해서

          인사도 없이 가셨는가.

 

3

 

          그동안 살기 바빠

          적조(積阻)하게 지낸 것이

 

          그대를 여의면서

          너무너무 부끄럽네.

 

          친구야! 다음 세상엔

          백년우정(百年友情꼭 이루세.

 

2016 2 16(화요일)

 

대학교 동기생 친구

     

  

 

대학교 동기생 친구 강창갑 군이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듣고 갑자기 제 귀와 가슴이 먹먹해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여러 해 동안 그 친구와 소식이 끊겨 문자(文字그대로 적조(積阻)하게 지냈는데, 이렇게 영영 이별을 하게 되니 친구에 대한 미안한 마음 아니 죄책감까지 들어 몸 둘 바를 모를 정도였습니다.

대학교 졸업 후 그 친구는 신문 기자(新聞記者)로 바삐 살았고, 저는 저 나름대로 먹고살기 위해 항상 동분서주(東奔西走)하며 살아야 했으니까요. 1940년대 후반기 그 어렵게 살던 시절에 태어나 6.25 전쟁의 폐허 속에서 성장하며 살아야 했던 제 또래 남자들은 너나없이 다 그렇게들 살아왔습니다. 대학교를 졸업할 때까지만 해도 아세아(亞細亞)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대한민국에서 살아야 했던 우리 또래 남자들은 정신적 여유가 없어서인지 제대로 놀 줄도 몰랐습니다. 어쩌다 오랜만에 학교 동기생 모임이나 각종 경조사(慶弔事)에서 동창생들을 만나면 행사가 끝난 후 무교동(武橋洞) 낙지골목으로 몰려가서 막걸리를 부어라 마셔라 하면서 젓가락 장단에 맞춰 떼창(-)’으로 트로트(trot) 노래나 겨우 불러댔으니까요.  당시에 국가적으로 회자(膾炙)되던 올해는 일하는 해”, “올해는 더 일하는 해”, “올해는 싸우며 일하는 해따위의 슬로건(slogan) 따위가 지금도 제 기억 속에 아스라이 떠오릅니다.

핸드폰이나 스마트폰이 없던 시절, 가정용 전화기가 재산목록에 들어갈 정도로 귀()해서 서로 전화연락조차 쉽지 않던 시절, 비록 먹고살기에들 바빠 자주 만나진 못해도 학창시절에 크게 주먹다짐을 나눈 사이만 아니라면 동창생 친구는 늘 아련한 그리움의 대상이었고, 오랜만에 만나면 반갑고 즐거운 친구였습니다.

강원도가 고향인 저와 호남(湖南) 출신인 강창갑 군은 비록 각자의 고향은 달랐지만 대학교 재학시절부터 서로를 인정하고 존중하고 어려운 일이 생기면 도움말을 구하고 충고해 주는 사이였습니다.

캠퍼스(campus) 안 잔디밭이나 플라타너스(platanus) 그늘 아래 놓여 있는 벤치(bench)에 앉아 이른바 개똥 철학을 주제로 서로 토론하기도 하고 노래도 부르고, 중간고사나 학기말고사 예상문제를 내걸고 시험공부를 함께 한 기억도 있습니다.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의 삼선개헌(三選改憲)을 반대하는 시위(示威)에 참가해 강창갑 군은 물론이요 학우(學友)들과 어깨동무를 한 채 하루 온종일 최루탄(催淚彈)에 맞서 눈물을 흘리며 고함을 고래고래 지르던 일도 새록새록 기억납니다. 당시에는 제가 소속된 국어국문학과가 대학교 전체 학과 중 서열 첫 번째였기 때문에, 데모(demo)를 할 때마다 전체 학생 시위대(示威隊)의 맨 앞 줄에 나서야 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위에 한 번도 빠지지 않았던 저희들의 만용(蠻勇)이 어디에서 어떻게 우러나올 수 있었던 것인지 지금 생각해 보면 쓴웃음이 절로 납니다. 그랬던 저와 우리 또래가 어느새 나이 들고 보수화(保守化)하여 지금은 젊은이들에게 이른바 수구(守舊) 꼴통의 몸통세대(世代)로 손가락질을 당하고 있으니 정말 쓴웃음이 절로 납니다. 

이러구러 1960년대와 1970년대 초기의 어수선한 시대의 와중(渦中)에서 그때까지만 해도 학생 신분이라는 공동운명체였던 저와 강군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육군(陸軍)에 입대(入隊)하면서 각자 새로운 인생길을 가게 되었습니다.

그 친구보다 조금 먼저 군복무를 하게 된 저는 그 친구보다 조금 먼저 군복무를 마치고 대학교 졸업 또한 먼저 하게 되었고, 취직도 먼저 하여 당당한 사회인이 되었습니다. 서울 용산(龍山)에 있던 미군부대(美軍部隊)에서 카투사(KATUSA)로 복무했던 그 친구는 말년병장(末年兵長) 시절에 저를 미군부대 안에 있는 클럽(club)으로 초대해 1970년대 초만 해도 보통의 한국인에게는 무척 낯선 새로운 문화를 접촉하게 해 주었습니다. 그 친구는 제대 후에 지금이나 그때나 모든 젊은이들이 선망(羨望)하는 언론인이 되겠다는 꿈을 꾸었기 때문에 참으로 열심히 공부했고, 마침내 꿈에도 그리던 신문기자가 되었습니다. 제 기억에 의하면 제 친구는 한때 전국적 신문기자 모임의 회장까지 역임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자니 이 친구가 얼마나 공사다망(公私多忙)한 세월을 보냈겠습니까. 저와는 전혀 분야가 다른 직종에서 살아 남아야 했기에, 저 또한 일 중독자(中毒者)’란 소리를 들을 만큼 제 직장에 충실히 하느라 강군은 물론이요 다른 친구들과 만나는 빈도수(頻度數)가 점점 줄어들어 저와 강군 사이는 서로 본의 아니게 소원(疎遠)해져 갔습니다. 그래도 저와 동업자거나 비슷한 직종에 종사하는 친구들은 이래저래 자주 만났고, 대학 시절 문학 동아리에서 이른바 동인(同人) 활동을 함께한 친구들은 일 년에 몇 차례씩 만났지만, 강창갑 기자와는 전화상으로만 간헐적으로 안부를 묻는 사이로 지내게 되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니 강창갑 군을 한 살이라도 더 먹은 제가 챙겨 주지 못한 것이 못내 후회됩니다.

휴대폰과 스마트폰이 일상화 된 요즘도 저와 6070의 제 또래들은 문자 메시지조차 잘 주고받지 않는 것이 체질화되어 있습니다. 이메일(e-mail) 사용도 습관화되지 못한 너무 올드(old)꼴통 세대가 되어 버렸습니다.

저의 가족과 친지들에게서 일 중독자(中毒者)’란 소리를 듣고 지내던 저는 점차적으로 건강이 너무 안 좋아져서 한일(韓日) 월드컵다음 해인 2003년에 30여 년 동안의 직장생활을 마무리하고 퇴직을 하였고, 아무 일도 안 한 채 집에서 요양생활을 했지만 결국에는 2006년 초에 심근경색(心筋梗塞)으로 쓰러져 중환자실에 입원해야 했고, 의식불명 상태에서 생사의 갈림길을 오명가명 하다가 어렵사리 회생하긴 했으나 지금껏 통원치료를 받으며 근근득생(僅僅得生)으로 지내고 있습니다.

현재 저는 사륜(四輪) 승용차는 물론이요 버스(bus) 20 분 이상을 못 타고, 지하철의 경우에도 한 시간 이상 걸릴 경우에는 차내에서 의식을 잃을 정도로 이상반응이 생겨서, 저 멀리 강원도에 있는 저의 고향에 성묘(省墓) 못 가는 것은 물론이요 가까이는 서울 시내에서 열리는 친인척의 애경사(哀慶事)에도 자동차를 타고 가야 할 경우엔 어쩔 수 없이 결석(缺席)을 하는 처지(處地)랍니다.   

강창갑 군의 부음(訃音)을 듣고서도 저는 빈소(殯所)에 가보지도 못하고 저 혼자 집에서 가슴앓이를 하며 밤을 지새워야 했습니다.

 

제가 30여 년의 직장생활을 마치고 집에 은거하기 시작할 무렵이었던가요? 어디서 어떤 경로로 알게 되었는지 강창갑 군이 참으로 오랜만에 전화를 걸어와 저의 퇴직을 따뜻한 말로 위로하고 격려해 준 일이 지금도 생각납니다.

그런데 저는 어저께까지만 해도 자랑스러운 제 친구 강창갑 군이 잘 지내고 있으려니 생각하고 있다가 부음 소식을 듣고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가 몹쓸 지병(持病)으로 저보다 먼저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으리라고는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일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의 다정한 음성, 조곤조곤한 말투, 친구를 배려해 항상 먼저 움직이던 그의 모습이 떠올라 저는 지난밤에 잠을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1960년대 후반기에 홍안(紅顔)의 나이로 대학교에 입학해 고() 강창갑 군을 만나 반세기(半世紀)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에 명색(名色)은 오십 년 우정을 이어왔다고 하지만 저의 불민(不敏)한 소치(所致)로 그와의 마지막 우정을 좀 더 미쁘게 맺지 못한 것이 못내 부끄럽고 한()스럽기만 합니다.

만약에 이승의 인연으로 다음 세상에서 강창갑 군과 다시 만날 수만 있다면, 그때는 우리 둘 다 건강한 몸으로 오래오래 살면서 오십 년 우정이 아닌 백 년의 우정을 단단히 맺어 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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