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교유록(交遊錄)

유붕(有朋) 자원방래(自遠方來)하니

noddle0610 2017. 11. 28. 23:30

 


유붕(有朋) 자원방래(自遠方來)하니





  

허허허, 유붕(有朋)이 자원방래(自遠方來)라 하더니

오십 년 사귄 그대 다시 만나 반가우이.

늙마에 아직도 보니 하느님께 감사(感謝)해라.

 


위 글은 엊그제 우거(寓居)를 찾아온 친구와 밤늦게 헤어지고 나서 즉흥적으로 끼적거려 본 시조(時調)올시다.

 

지난 동짓달 그믐께 저의 대학교 친구에서도 가장 절친했던 친구 박준서 군이 오랜만에 우리 집을 방문했습니다.

 

박군(朴君) 1960년대 후반기에 대학교 입학 동기생으로 만나 전공학과(專攻學科)는 달랐지만 지금껏 살아오면서 아무리 각자 살길이 바쁘고 서로 하는 일이 달랐어도 한 해도 거르지 않고 만남을 지속해 온 문자 그대로 금란지교(金蘭之交)의 친구이며, 제가 이 세상을 살아오면서 인연을 맺은 몇 명 안 되는 ‘지음(知音)’ 중에서도 최고의 벗, 요즘 시쳇말로 ‘베프(Best Frend)’ 중에서도 최고의 ‘베프’랍니다.

 

박군은 경제학과 학생이었고 저는 국어국문학과 학생이었지만 ‘정오문학동인회(正午文學同人會)’라는 서클(circle)에서 만나, 요즘 말로 ‘동아리 활동’을 함께 하면서 대학교 3학년 재학 중(在學中)에 군대에 가기 전까지 하루도 빠지지 않고 거의 매일 만나 문예창작 작품을 보여 주거나 토론을 하였고, 밤이면 무교동(武橋洞)에 있던 ‘낙지골목’까지 진출해 통행금지 직전까지 막걸리에 취해 고담준론(高談峻論)에서 시작해 개똥철학으로 그날 하루를 마감하곤 하면서 서로의 우정(友情)을 돈독히 하곤 했습니다.

 

어느 해였던가. 그해엔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의 ‘삼선 개헌(三選改憲)’을 반대하는 대학가(大學街)의 데모(demo)가 일 년 내내 계속되어 걸핏하면 문교부(文敎部) 당국의 휴교령(休校令) 때문에 학교엔 못 가고 집에서 자율학습(自律學習)을 해야 했는데, 아무튼 그해에 학교에서 순수하게 강의를 들을 수 있었던 기간은 1~2학기 통틀어 다섯 달도 못 되었지만, 박군과 저, 그리고 교육학과(敎育學科)에 다니던 강경식(姜庚植) () 등 문학서클 친구들은 자주 서울 시내(市內)나 학교 근처 다방(茶房)과 중국음식점 2, 아니면 학교 근처 막걸리 집에서 만나 습작(習作)해 온 시()와 단편소설을 프린트(print)한 동인지(同人誌)를 꺼내 놓고 갑론을박(甲論乙駁)하며 때로는 암울한 시국(時局) 때문에 울분을 토로(吐露)하면서 문교부의 휴교령 때문에 공부를 못해 통분(痛憤)해하기는 했지만 그 대신 망외(望外)의 소득으로 독서와 습작을 많이 할 수 있어서 얼마간이나마 우리들 스스로를 위로할 수는 있었습니다.

 

그 와중(渦中)에 박군과 저는 학교를 휴학(休學)하고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각각 육군(陸軍)에 용약입대(勇躍入隊)하였습니다. 박군은 백마부대(白馬部隊)의 용사로 베트남(Vietnam) 전선(戰線)에 파병(派兵)되어 근무했고, 저는 보병(步兵) 1사단 예하(隸下) 병기중대(兵器中隊)에서 근무했으며, 박군보다 제가 먼저 복학(復學)해 대학을 졸업했고, 졸업식날은 박군과 강경식 군이 저를 찾아와 축하를 해 주었는데, 그날 저는 박군과 함께 통행금지 시간이 넘도록 술을 마셔댔고 결국 집에는 못 들어간 채 여관(旅館)에 들어가 하룻밤 외박(外泊)을 하였습니다.

 

대학교 시절엔 단 하루도 ‘문학(文學)’이란 두 글자가 뇌리(腦裏)에서 떠난 적이 없었는데, 대학교 졸업 후에는 박군이나 저나 각박한 세태(世態) 속에서 각자도생(各自圖生)하느라 무늬만 ‘문학청년’이었지 실제로는 습작(習作)을 할 만한 정신적 여유가 없이 바삐 살아야 했습니다. 대학 재학 중에 군대생활을 해야 했기 때문에 졸업이 늦어져서 막상 저희들이 사회에 진출할 무렵에는 이른바 ‘시월유신(十月維新)’ 사태가 갓 일어나 그때까지 우리들이 단 한 번도 경험하지 못했던 엄혹(嚴酷)한 시대 상황 속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해야 했습니다. 문학청년(文學靑年)의 낭만(浪漫) 따위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연이은 긴급조치(緊急措置)의 시국(時局)을 그저 조심조심 살얼음을 밟는 기분으로 살아야 했던 거지요. 무슨 큰 죄를 지은 것도 아니면서 늘 전전긍긍(戰戰兢兢)하면서 ’70~80년대 시절을 보냈는데, 그런 가운데서도 저와 박군 그리고 강경식 군, 이렇게 트리오(trio)는 가끔씩 무교동(武橋洞) ‘낙지골목’에서 만나 술잔을 기울였으며 서로를 격려하곤 했습니다.

 

통행금지가 있던 시절, 노량진에 있던 박군의 집에 가서 가끔씩 친구들과 함께 밤을 함께 보내며 밤새도록 킬킬대거나 후당퉁탕 노느라 시끄럽게 굴었지만 박군의 부모님들은 단 한 번도 싫은 내색을 안 보이셨으며, 늘 미소로 저희 친구들을 맞아 주곤 하시던 박군 어머니의 인자하신 모습이 지금도 새록새록 제 기억 속에 남아 있습니다.

 

1940년대 후반에 태어나 20세기 격동의 세월을 정신없이 바쁘게 살아온 박군과 제 또래 친구들은 새로운 밀레니엄(millennium)이 시작되는 21세기 초에 들어와서부터는 자의반(自意半) 타의반(他意半)으로 이 사회의 주류(主流)가 아닌 아웃사이더(outsider : 局外者)로 차츰 밀려나기 시작했는데 아무래도 그 결정적 요인(要因)은 이른바 20세기 말에 겪어야 했던 ‘아이엠에프(IMF) 파동(波動)’ 때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희 세대(世代)는 저 고난의 6.25를 겪고 폐허가 다 된 1950년대를 어린 나이에 억세게 적응해 살았던 저력(底力)을 바탕으로 지금껏 정말 용케 살아왔으며, 지금에 와서 지난날을 돌이켜 보건대 정말 파란만장(波瀾萬丈)한 생애(生涯)를 보냈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듭니다.

 

요즘 20대와 30대 초반의 젊은이들은 아무리 학창시절에 친했던 친구라도 학교졸업 후에 각자 살기 바빠 소원(疎遠)해지기라도 하면 그것으로 절친 사이는 끝나 버린다고 하더군요.

 

박군과 강경식 군, 그리고 나, 이렇게 세 친구는 비록 각자의 직업이나 인생 행로(人生行路)는 달랐지만, 1960년대 후반기에 처음 만났을 때의 초심(初心) 그대로 사귀어 왔으며, 비록 바빠서 자주 못 만난다고 할지라도 최소한 일 년에 한두 번쯤은 반드시 만나서 술잔을 함께 기울이며 우정을 더욱 도타이 북돋우곤 했습니다.




 

그런데 21세기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되어 제가 병마(病魔)에 쓰러지고 나서는 자동차도 함부로 탈 수 없을 정도로 건강이 여의(如意)치 않아 그때부터 박군과 강군이 제가 살고 있는 동네로 직접 찾아와서 저를 격려해 주었고, 2010년대에 들어와서는 강경식 군마저 함부로 기동(起動)을 못할 정도로 몹쓸 병에 걸려 저보다 더 건강상태가 안 좋아져서 작금(昨今)에 이르러서는 박군이 강군과 저의 집을 오가며 우정(友情)의 메신저(messenger) 노릇을 하고 있는 형편입니다. 저는 제 건강상 컨디션이 최고 좋았던 재작년(再昨年) 어느 날 큰맘 먹고 박군과 함께 옥수동(玉水洞) 아파트로 강군을 찾아가 회포(懷抱)를 푼 적이 있습니다만, 작년에는 그러지 못했습니다. 다만 요즘에는 잡문(雜文)을 가끔씩 끼적거려 이메일(e-mail)을 통해 강군에게 저의 '존재'를 알리고, 그에 대한 애틋한 그리움을 달래곤 한답니다.


세 친구 중에 가장 몸이 강건(剛健)한 편인 박군은 여러 해 전에 당시 나이로 60대 후반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모() 문예지(文藝誌)의 추천을 받아 늦깎이로 소설가(小說家)가 되었습니다. 작년 여름에 교통사고를 크게 당해 장기간 병원에 입원해 있었다는 소식을 이번에 저의 집 방문을 통해 그에게서 듣고 저는 깜짝 놀라 그를 마구 나무랐습니다만, 다행이도 현재 건강 상태는 겉으로 보기에 많이 좋아진 것 같습니다. 소설가 이문열(李文烈) 선생이 운영하는 곳에서 머무르며 글을 쓰다가 잠시 외출 중에 사고를 당했던 모양인데, 아무튼 그의 건투(健鬪)가 부럽기만 합니다.


제가 12년 전 바로 이맘때쯤 혹독한 추위를 못 견디고 쓰러져 생사지경을 오갈 적에 강군과 박군은 제가 입원해 있던 병원 중환자실 앞에서 저의 회복을 기원하며 발을 동동 굴렀다고 하는데, 막상 두 친구가 쓰러졌을 적에 저는 그들이 처해 있던 상황을 전혀 몰랐었으니, 저야말로 오늘날 두 친구에게 심적(心的)으로 큰 빚을 지고 사는 셈입니다.


저는 지금껏 살아오면서 친구가 그리 많지는 않지만 친구를 사귀면 비교적 오래 사귀고 깊이 정을 나누며 지내는 사람이랍니다. 심지어는 48년 전에 보병(步兵) 1사단 예하(隸下) 병기중대(兵器中隊)에서 군대생활을 같이 했던 전우(戰友)와도 아직껏 교분을 나누고 있을 정도니까요.


그런데 박군과 강군은 저의 청춘 시절 군대에 가기 전까지 거의 매일 하루도 빠지지 않고 만나 각자 습작(習作)해온 시와 소설을 펼쳐 놓고 열정적(熱情的)인 시간을 함께 보낸 문학동인회(文學同人會) 소속의 절친한 동인(同人)이었으니, 그때부터 오늘날까지 끊어지지 않고 이어져 온 우리 세 친구 간(親舊間)의 우정의 깊이는 지금 굳이 따져 보지 않아도 너무도 자명(自明)하게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들이 만난 지 반세기(半世紀)가 넘는 세월이 흘러갔지만 그동안 단 한 해도 소식을 끊지 않은 채 금란지교(金蘭之交)를 나눈 ‘지음(知音)’ 중에서도 최고의 벗, 요즘 시쳇말로 ‘베프(Best Frend)’ 중에서도 최고의 ‘베프’인 박준서 군과 강경식 군!


  이제 혹독한 추위의 겨울이 가고 따뜻한 봄이 오면 제 몸 컨디션이 아주 좋은 날을 골라서 박군과 함께 경식 군을 만나러 갈 작정입니다.


  저는 시방(時方) 너무 행복합니다. 비록 건강이 썩 좋은 편은 아니지만 아지 살아 있기에 저를 찾아오는 벗님이 있고, 또 제가 찾아가야 할 벗님이 있어서 너무너무 행복하답니다.


허허허, 유붕(有朋)이 자원방래(自遠方來)라 하더니

오십 년 사귄 그대 다시 만나 반가우이.

늙마에 아직도 보니 하느님께 감사(感謝)해라.



2017 11 28


박   노   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