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동네 풍경

불광천 기슭에 찾아온 봄 풍경을 바라보면서 떠올린 이런저런 생각

noddle0610 2018. 3. 31. 23:30












불광천 기슭에 찾아온 봄 풍경을 바라보면서 떠올린 이런저런 생각



동장군(冬將軍)님의 대단하신 위엄(威嚴)은 평창(平昌) 동계 올림픽(Olympic Games)과 패럴림픽(Paralympic Games)에 때맞추기 위해서였는지는 몰라도 예년(例年)에 비해 그 오지랖이 너무 넓고 뒤끝이 은근히 길었다. 2월달은 말할 것도 없고 3월 중순에도 우리나라 대부분 지역에 눈이 내려서, 그 여파로 나는 지난 주초(週初)까지도 매일 산책을 할 때 패딩(padding) 옷을 꼭 걸쳐야 했고 양쪽 손에는 장갑을 반드시 껴야 했다.  


3월 초순에 내가 살고 있는 아파트(Apart) 바로 뒤의 초등학교에 입학식이 있었는데, 꽃샘 추위가 나이 어린 신입생들이나 젊은 학부모님들의 학교에 대한 설렘을 꽁꽁 얼어붙게 하는 걸 보고, 나는 각급 학교의 입학식을 제1 공화국, 2 공화국 시절처럼 다시 개나리 진달래가 활짝 피는 4월 초순으로 되돌려 놓아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잠시 해 보기도 했다.   



 나는 제1~2 공화국 시절에 국민학교와 중학교에 각각 입학을 했는데, 지금도 ‘입학식(入學式)’ 세 글자를 떠올리기만 하면 4월의 화창한 봄 날씨와 더불어 개나리꽃,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꽃이 만발한 모습을 떠올리게 되고, 그 희망에 가슴 부풀었던 유소년(幼少年) 시절을 회상하며 남몰래 미소를 흘리곤 한다.  


   6.25 전쟁의 참화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던 휴전협정 체결 이듬해에 국민학교에 입학했고,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의 자유당(自由黨) 정권이 끝나고 장면(張勉) 총리의 민주당(民主黨) 정권이 들어설 때 중학교에 입학을 했는데, 그 때는 3월달에 각급학교의 졸업식이 거행되었고, 바야흐로 꽃 피는 4월 초승에 각급학교의 입학식들이 열렸다. 


나는 일찍이 강원도 영서지방(嶺西地方) 내륙을 관통하는 소양강(昭陽江) 기슭에 위치한 국민학교를 졸업했는데, 그 날이 3월 하순, 그러니까 정확히 말해서 3 22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바로 엊그제처럼 때늦은 폭설이 하루 종일 내렸고, 나는 모교(母校)와 작별하는 사람답게 엉엉 울며 어머니 손을 꼭 붙잡은 채 꽁꽁 얼어붙은 소양강을 뒤뚱뒤뚱 걸어서 건너 집으로 갔다 




그리고 열흘 후인 4월 초하룻날에 서울의 남산(南山)보다 더 높고 험한 이십 리 고갯길 너머 인제군(麟蹄郡) 남면(南面)에 있는 신남중학교(新南中學校)에 입학을 했다. 불과 열흘 전에 폭설이 내렸는데, 어느새 중학교 가는 고갯길 양쪽에는 개나리꽃이 흐드러지게 만발하여, 당시 나는 비록 어린 나이였지만 대자연의 순환이랄까 섭리에 대해 난생 처음 경외감(敬畏感) 비슷한 감정을 품었다 


아무튼 추위는 물러가고 화창한 날씨에 중학생이 된 나는 너무너무 기분이 좋았다. 날씨가 여전히 추웠다면 새 학교에 적응할 때 기분도 몹시 을씨년스러웠을 텐데, 날씨도 좋고 산지사방(散之四方)에 개나리 진달래꽃이 복숭아꽃 살구꽃과 함께 잇달아 피어 새로운 출발을 하기에 4월달은 아주 최적(最適)의 타이밍(timing)이었다. 때마침 바로 한 해 전까지 다른 곳에 있던 신남중학교가 ‘더수러니고개(일명 신남고개)’ 기슭에 새로 이사(移徙)를 하여 우리 동기생(同期生)들은 새로운 석조건물의 첫 입학생이 되었는데, 그 긍지(矜持)를 기념하기 위해서 학교 주변에 대대적인 식목(植木)을 하게 되었고, 그때 1960년대 초에 심었던 나무들은 아주 울울창창(鬱鬱蒼蒼)하게 자라나 요즘에도 나의 모교 ‘신남중학교’를 아주 멋지게 에워싸고 있다 


이런저런 까닭으로 해서 나는 5.16 군사정변(軍事政變) 이후에 바뀌어진 현재의 학기제(學期制)를 못마땅하게 생각한다. 우리 어린 학생들이 오들오들 떨면서 엄마 아빠 손을 잡은 채 유치원이나 초등학교, 중등학교에 입학하는 3월 입학식과 개학식을 다시 4월 초승께로 바꾸면 어떨까 생각한다.     



나는 불과 열흘 전까지만 해도 바깥 나들이를 하려면 오들오들 떨면서 초미세먼지 예방 마스크(mask)를 쓴 채 패딩 옷과 장갑으로 중무장(重武裝)을 하고 아파트 현관(玄關)을 나서야 했다. 어언간(於焉間)에 나도 ‘인생(人生) 칠학년(七學年)’을 마크(mark)하게 되었고, 십여 년 전부터 심혈관(心血管) 계통의 질환을 앓고 있어서, 날씨가 추운 겨울철과 너무 뜨거운 여름날, 그리고 초미세먼지나 황사(黃沙) 현상이 심한 날은 아무래도 중무장을 하지 않으면 외출을 망설이게 된다.  

강원도 내륙지방 고산지대 출신이라서 산기슭 비탈길도 잘 타고 심장이 튼튼했는데, 중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에 올라와 타향살이 수십여 년에 스트레스(stress)가 너무 많이 쌓여, 지나간 40여 년 세월 동안 매일매일 담배 4갑씩 줄기차게 피워댔고, 술은 대장(大腸)이 본디 안 좋은 까닭에 맥주나 소주(燒酒)를 못 마시는 대신에 오히려 알코올(alcohol) 도수(度數)가 오십 도()를 뛰어넘는 술을 즐겨해서 ‘배갈[白干兀]-위스키(whiskey)-문배주(문배술)’ 등등 독주(毒酒) 종류만 마셔댔기 때문에 심혈관이 망가져서 결국 어느 해 엄동설한(嚴冬雪寒)에 생사(生死)의 갈림길을 넘나든 적도 있다. 그 당시 용산구에 있는 아무개 종합병원에서는 가족들을 통해 내게 사형선고까지 내렸지만 곧 다른 병원으로 옮겨서 집중치료를 받은 결과 간신히 살아났다. 현재는 매일매일 약물(藥物)에 의지해 근근득생(僅僅得生) 목숨을 이어나가고 있다. 그래서 요즘 나에게는 하루에 한 시간씩 공원이나 강변, 개울가를 산책하는 일과 유산소운동(有酸素運動)을 하는 것이 필수적이지만 미세먼지 현상이 심하거나 혹한기(酷寒期)와 폭서기(暴暑期)에는 가급적 외출을 삼가야 한다는 주치의(主治醫) 선생님의 말씀이 있고 해서, 매일매일 일기예보에 세심하게 주의를 기울이며 살얼음을 밟듯이 나의 여생(餘生)을 보내고 있다. 



올해 3월달에는 내내 날씨도 고르지 못한데다가 미세먼지 상황이나 황사현상이 너무 안 좋았기 때문에 바깥나들이를 정상적으로 할 수가 없었다. 그러다 보니 아파트 베란다(veranda)에서 하루하루 달라져 가는 뒷산의 경치를 바라보거나, 아파트 바로 뒤쪽 아래에 있는 초등학교 쪽으로 눈길을 보내게 된다 


특히나 초등학교 아이들이 등교할 때나 하교할 때 시끌벅적하는 소리나 조잘조잘대는 소리를 들을 때는 그것이 소란스럽게 들리지 않고 나의 마음을 동심(童心)으로 되돌아가게 하기 때문에 나는 아이들의 등하교 모습을 기꺼이 즐겨 보곤 한다.  하여, 내 상상의 날개는 과거 속으로 훨훨 날아서 1950년대 중반 ‘국민학교 시절’을 다시 내게 되찾아다 주기도 하기 때문에, 바깥나들이를 안 하는 날에는 거의 매일 초등학교께를 내려다본다 


전쟁 통에 모든 것이 파괴 되었기 때문에 대부분 공터에서부터 새로이 모든 것을 다시 세우고 살아야 했던 1950년대 중반에 내가 다닌 국민학교는 소나무 숲 속에 천막(天幕)을 치고 개교(開校)를 했다. 이광모 감독(1961~)의 영화 ‘아름다운 시절’에 나오는 천막학교가 바로 내가 다니던 학교의 모습 그대로다.


천막 안에 들어가면 볏짚으로 엮은 쌀가마니를 바닥에 깔고 사과궤짝을 책상 삼아 공부했는데 그나마 4~6학년 형()들만 그 궤짝 위에 책을 펼쳐 놓고 공부했고, 1~3학년 학생들은 책상도 없이 볏짚 가마니 위에 엎드린 채 책을 읽거나 몽당연필 끝에 침을 퉤퉤 묻혀 가며 공책에다 삐뚤빼뚤 글씨를 써야 했다. 책가방도 없이 보자기에다가 책과 필통, 그리고 도시락을 함께 싸서 어깨에 둘러메고 다녔는데, 달리기라도 하면 필통 속 연필과 도시락 속 숟가락 젓가락들이 제멋대로들 부딪히는 소리가 나서 몹시 시끄러웠다 


여름엔 천막 안이 너무 더워서 산기슭에 올라가 굵은 소나무 기둥에다 칠판(흑판)을 매달아 놓고 공부를 하였다



부모님과 함께 자가용 승용차를 타고 등하교하는 요즘 초등학교 학생들, 걸어서 등하교하는 학생들도 초급학년 학생들 상당수는 멋진 옷차림의 어머니나 할머니와 함께 손을 잡고 깡총깡총 뛰면서 학교를 오가곤 하는데, 그 모습들을 우리 아파트에서 창문을 열고 내려다 보노라면 저 1950년대 중반의 내 자화상(自畵像)이 불현듯 뇌리에 떠오르기도 한다. 


나의 국민학교 시절, 터벅터벅 십 리 길을 걸어서 소양강 나루터에 도착하게 되면, 아이들이 최소한 10여 명 정도가 모일 때까지 나룻배가 오기를 기다려야 한다.  인원 구성이 어느 정도 이루어지게 되면 강 건너편에 사는 뱃사공 아저씨가 들을 수 있게 아주 큰소리로 마치 합창을 하듯이 소리를 지른다.


“배 건너 주세요.

“배 건네 주세요오. 아저씨”  


젖 먹던 힘까지 다 쏟아’ 떼창(-)’으로 뱃사공을 부르면 한참 시간이 흘러야만 뱃사공 아저씨가 어슬렁어슬렁 나타나 나룻배를 타고 삿대질을 하여 아이들이 모인 곳으로 온다. 


   그런데 상당수 학생들은 6.25 전쟁으로 정상적인 학령(學齡)을 넘겼기 때문에 상관 없었지만, 요즘 식으로 정상적 학령에 해당하는 일곱 살배기나 여섯 살짜리 아이들은 나루터에서 배에 오를 때 그 턱이 너무 높아서 아주 애를 먹곤 했다. 다리가 짧거나 힘이 약한 아이들은 울면서 여러 차례 시행착오(施行錯誤) 끝에 배를 타는데, 가끔씩 어떤 아이들은 끝내 배를 못 타고 집으로 돌아가거나 아니면 다시 배에 오르는 시도를 하다가 강물에 빠지는 경우도 있었다. 뱃사공 아저씨는 승선 인원이 많을 경우에 배가 하류(下流)께로 떠내려가지 않도록 삿대로 배를 고정시켜야 하기 때문에 일일이 아이들을 항상 도와줄 수가 없었다.   


자가용 승용차 개념이라곤 전혀 없었던 1950년대 중반에 국민학교를 다녀야 했던 나로서는 승용차로 등하교를 하는 요즘 학생들이 마냥 부럽기만 하다. 부모님과 함께 손 붙잡고 등하교를 하는 요즘 학생들도 마냥 부러워 보인다.   


내 또래의 세대들이 이른바 국민학교를 다니던 시절엔 대부분의 어른들이 농사를 짓거나 전쟁의 폐허에서 무슨 일이든지 해야만 입에 풀칠을 할 수 있었기 때문에 자기 집 아이들을 손수 학교에 대려다 줄 수 없었다.


농사(農事)일이라 하는 것은 햇볕이 따가운 대낮을 피해서 이른 새벽부터 일을 해야 하는 경우가 많은 데다가 우리 집은 아버지가 안 계셔서 어머니가 남정네 일까지 하셔야 했기 때문에 나는 국민학교 입학식 때도, 중학교 입학식 때도, 서울에 유학을 와서는 고등학교와 대학교 입학식 때도 나 혼자 입학을 했다. 따라서 평상시 등하교에 어머니가 동행한다는 것은 꿈도 꿀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나의 어머니께옵서는 국민학교, 중학교와 대학교 졸업식, 대학원 학위 수여식 때는 꼬박꼬박 참석해 주셨다. 그때는 농한기(農閑期)였기 때문이다. 


어디 나 뿐이었으랴. 시골에서 학교를 다닌 내 친구들의 경우도 대부분 부모님들이 졸업식에는 참석해 주셨지만, 평상시에는 남자 어른들은 국방색 작업복을, 여자 어른들은 검정색 몸뻬바지를 벗을 틈이 없어서 나의 경우와 똑같이 자녀의 등하교에 동행을 하거나 학교 선생님을 찾아 뵙는 일 따위는 언감생심(焉敢生心)에 바랄 수가 없었다. 


다만 내 어머님께옵선 생전(生前)에 당신의 첫째 손녀 딸, 즉 나의 첫째 딸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한 이후 졸업할 때까지 꼬박꼬박 내 딸아이를 학교에 데려다 주시곤 했다.        



서슬 퍼렇던 동장군(冬將軍)께옵서도 지난 주말에 북쪽 나라로 완전히 물러가신 듯해서, 바로 엊그제 어제 오늘 연달아 사흘 째 나는 디지털 카메라(digital camera)를 어깨에 둘러메고 우리 동네에 있는 불광천(佛光川) 천변(川邊)을 찾아갔다 


올해 들어 몇 차례 불광천을 찾은 적이 있긴 하지만 초미세먼지 걱정도 있고, 날씨도 제법 쌀쌀해서 혹시 심혈관에 악영향을 끼칠까 저어해서 불광천 천변에 있는 지하철 역() 한 구간(區間) 거리 정도만 걷다가 도중에 그만 두었는데, 이번에는 마음 단단히 먹고 산책길의 첫 출발지점부터 맨 마지막 반환지점까지 거의 다 답파(踏破)해 냈다.  


겨우 내내 입어서 다소 무겁게 느껴지는 블랙 컬러(black color)의 패딩 옷도 벗어 던지고 장갑(掌匣)도 벗어 던지고 가벼운 나들이 차림새로 불광천의 갓길에 들어섰는데, 그곳에는 어느새 본격적인 봄철이 바싹 다가와 있었다.





열흘 전만 해도 천변 풍경(川邊風景)은 문자(文字) 그대로 ‘춘래(春來) 불사춘(不似春)’의 상황, 즉 개울가 양쪽 들판 대부분에 바싹 말라 죽은 억새풀만 잔뜩 우거져 있었는데, 그 억새풀 아니면 누렇게 시든 풀만 잔뜩 펼쳐져 있던 곳에 파릇파릇한 새싹들이 본격적으로 우거지기 시작하고 있었고, 개울가 능수버들 나무의 휘휘 늘어진 가지에도 연초록(軟草綠) 새잎들이 빼곡히 길쭉이 돋아나 벌써부터 자신들의 무게를 견디지 못한 실버들나무의 나뭇가지들이 봄바람에 살랑살랑 나부끼며 아예 춤을 추고 있었다.   




그저께만 해도 불광천 행길에 개나리꽃이 드물게 간헐적으로 피어 있었는데, 탐승(探勝) 사흘째인 오늘 보니까 제법 우후죽순(雨後竹筍)처럼 샛노란 개나리 꽃덤불들이 자전거 길 위쪽 언덕배기와 비탈진 곳에 마치 열병식(閱兵式)하듯 무성(茂盛)하게 쭉 늘어서서 그 탐스런 자태(姿態)를 마냥 뽐내고 있었다.  


하루하루가 달라져 가는 불광천의 봄맞이 풍경을 보니, 문득 저 유명한 은()나라 탕왕(湯王)의 “구일신(苟日新) 일일신(日日新) 우일신(又日新)”이라는 명언(名言)이 생각났다. ‘실로 날마다 새로워지고, 날마다 새로워지되, 또 날마다 새로워진다’를 평생의 좌우명(座右銘)으로 삼고자 욕조(浴槽)의 반명(盤銘)으로 아로새겨 두었다는 비로 그 구절(句節) 말이다 


도대체 탕왕은 얼마나 목욕을 자주했으며, 얼마나 많은 시간을 탕() 속에 몸을 담근 채 나랏일을 보살폈기에 후대(後代) 사람들로부터 성군(聖君)으로 칭송(稱頌)받고 ‘탕왕’이란 존호(尊號)까지 받게 되었을까.     


매일매일 목욕재계(沐浴齋戒)를 하면서 몸과 마음을 함께 새로이 닦으려 했던 탕왕(湯王) 전하(殿下)의 자세 앞에 새삼 머리가 숙여지거니와, 나는 오늘 불광천 개울가를 오명가명 거닐면서 모름지기 인간이라면 매일 수양(修養)을 열심히 해야 날마다 새로워질 수 있겠지만 대자연(大自然)은 그 오묘한 공즉시색(空卽是色) 색즉시공(色卽是空)의 순환섭리로 날마다 스스로 새로워진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그런 진리를 진지하게 되새겨 볼 생각은 전혀 안 한 채 지난 한 달 동안 전국적으로 날씨가 좀 고르지 못하다 해서 마치 삼천리 강산에 봄다운 봄이 돌아오지 않고 꽃도 제대로 피지 않을 것처럼 호들갑을 떤 사람들은 없었는지 ‘나’를 포함해서 자성(自省)해 봐야 하겠다     


어쨌거나, 며칠 전만 해도 순조롭지 않은 날씨 때문에 매우 의기소침해 있던 나였지만 불광천 꽃들의 아리따운 개화(開花) 모습을 보노라니, 내 몸 속에 잠재해 있던 이른바 ‘춘흥(春興)’이란 것이 다시 약동(躍動)하기 시작한 것 같아 한결 기분이 상승(上昇)된 나는 열심히 사방을 눈여겨보며 발걸음을 재촉해서 카메라의 셔터(shutter)를 열심히 눌러댔다 




다음 주 토요일에는 불광천에서 구청(區廳)의 주관(主管)으로 ‘벚꽃 축제’가 열리고 유명한 연예인(演藝人)들도 수상 무대(水上舞臺)에서 공연을 할 예정이라는데, 아직 벚꽃은 별로 눈에 띄지 않아 그 점이 며칠 전부터 조금 유감스러웠다. 





 

그런데 사흘 전이었다. 아직은 어리고 자그마한 벚꽃나무 딱 한 그루에 벚꽃이 함초롬히 핀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왕년(往年)에 김영삼(金泳三) 대통령께서 자주 찾아오셨던 단골 식당 ‘봉희설렁탕’ 바로 건너 편에 있는 꽃나무였다. 그 나무 곁이나 바로 아래 위쪽에 오히려 제법 커 보이는 벚꽃나무들이 몇 그루 있었건만 다 차치(且置)하고 불광천 최초의 벚꽃은 아주 가늘고 여린 나무에 피었다. 바로 그 나무에서 몇 발자국만 가면 ‘재활용 쓰레기 수거’ 시설물이 설치되어 있고, 다시 몇 발자국 더 가면 ‘공중 화장실’이 있다. 가장 지저분하고 불결할 수도 있는 시설물 옆의 보잘것없이 앙상한 나무에 벚꽃이 먼저 피다니!……  


  불교(佛敎)에서 귀히 여기는 연()꽃은 진흙 속에서 잘 피어난다던데, 하고많은 벚꽃나무들 중에서 키가 큰 나무들을 제치고 하필이면 화장실 옆의 나이 어린 나무에 올해 처음으로 벚꽃이 핀 것은 무엇을 시사(示唆)하는 것일까.


이래서 세상은 참 공평하고 살만한 곳이라는 생각이 들긴 하지만,  과학적으로 논리적으로 디테일(detail)하게 따지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아마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이번에 꽃이 가장 먼저 핀 나무는 다른 벚꽃나무들에 비해 가장 늦게 심어진데다가 그 품종이 조생종(早生種)이라서 그런 것이라고 말이다. 그 말인즉슨 맞는 말일 수도 있겠으나, 꼭 그렇게까지 냉정하게 설명해서 모처럼만에 인문학적인 감성에 빠져들던 나 같은 ‘꼰대’의 환상을 무참히 깨부술 필요가 있겠는가를 리얼리스트(realist) 여러분에게 반문(反問)해 보고 싶다


오늘은 비록 여기 한 그루에만 벚꽃이 홀로 피어 있지만 다음 주 4월 2~3일쯤에는 여기저기 벚나무마다 꽃들이 만개(滿開)하여 그윽한 향기들을 뿜어낼 것이다. 그때쯤엔 아무리 미세먼지가 극성을 부려도 이 불광천은 인근(隣近) 동네들, 불광동-갈현동-구산동-응암동-역촌동-신사동-증산동-수색동-상암동에서 찾아온 탐승객(探勝客)들로 온통 성황(盛況)을 이룰 것이다. 예년과 달리 마스크로 코와 입을 가린 사람들이 산책로(散策路)를 가득 채우며 북새판을 이룰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저절로 웃음이 나온다. 그들은 벚꽃나무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을 때 마스크를 벗을까, 아니면 잠깐이라도 마스크를 벗고 셀프-카메라(self camera) 앞에 자신들의 자부심 가득 찬 얼굴을 내밀까? 


어쨌거나 봄이 이 땅에 찾아와서 지난겨울에 석 달 동안 동장군(冬將軍)님의 엄혹(嚴酷)한 독재(獨裁)에 시달림받은 우리의 기억들을 어느새 감쪽같이 잊게 해 주니 기분이 매우 좋다.


이 불광천에만 봄이 온 것이 아니라 우리나라, 아니 한반도(韓半島) 전체에도 진정한 평화의 봄이 찾아와 그동안 있었던 갈등과 싸움 내지 전쟁의 공포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게 해 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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