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 지킴이 '장군(將軍)이'를 떠나보내며
오늘 낮 신시(辛時) 초(初)에
우리 집 든든한 지킴이 '장군(將軍)이'가
거실(居室)에서 혼자 운명(殞命)했습니다.
2004년 4월 15일에 태어나
오늘 열다섯 살 나이로
삶을 마감한 것입니다.
우리 처갓집에서 태어나
우리 집으로 입양(入養)되어
오던 날,
어찌나 건강하고
날렵하던지
지금도 그날 모습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자기 형제들 중에서도
가장 힘이 세어
이 아이의 이름을
우리는 ‘장군’이라고
지었습니다.
얼굴은 수컷답게
다소 무섭게 생겼지만
애교도 많고
재롱을 잘 부려
가끔씩 아무 데서나
실례(?)를 해도
차마 야단을 칠 수가 없었던
우리 집 귀염둥이 강아지
그 이름 장군이!
2016년 여름까지
저희가 삼십 년 가까이 살던
단독주택에서
장군이는 열두 해 동안
우리 집 대문(大門)을 지킨
문자(文字) 그대로
수문장(守門將)이였습니다.
누군가 대문 앞에 얼씬거리기만 하면
사자(獅子)가 포효(咆哮)하는 듯한
우렁찬 목소리로
경계심(警戒心)을 드러내어
이웃 사람들이나
음식 배달원(配達員)
택배원(宅配員)들 사이에
무서운 강아지로 소문이 났고
우리 식구(食口)는 모두
장군이 덕분에
늘 마음 든든해하였습니다.
장군이는 노래도
아주 잘 했습니다.
특히나 우리 집 골목 어귀에
고물(古物) 장수 아저씨가
핸드마이크[ hand held mic]를 들고
나타나기만 하면
그 아저씨의
신명 나는 가위춤 장단에 맞춰
제 딴에는
아주 청아한 목소리로
구성지게 노래를
부르곤 했습니다.
고물 장수 아저씨들 사이에서
우리 집 장군이는
‘노래하는 강아지’로
아주 유명해졌지요.
때때로 초등학교에 다니는
동네 꼬마 악동(惡童) 녀석들이
돌멩이를 던지거나
대문 틈 사이로
나무 꼬챙이를 찔러 넣어
우리 장군이를 다치게 하는 경우도
더러 있었지만
장군이는 단 한번도
우리 집 수문장(守門將)으로서의
소임(所任)을 회피하지도
망각하지도 않았습니다.
2016년 여름
단독주택 생활을 청산하고
우리 집 식구들은 모두
아파트(Apart)로 이사해
새로운 문화를 겪게 되었는데
장군이라고 해서 예외(例外)가
될 수는 없었지요.
장군이 목소리가 워낙 커서
혹시나 아파트 아래윗집 사람들의
민원(民願)이라도 있으면
어쩌나 싶어
우리 집 식구들은
의논 끝에
안쓰러운 마음을
애써 누른 채
장군이에게 성대(聲帶) 수술을
해 주었습니다.
그 뒤로 다시는
장군이의 청아한 노랫소리와
때때로 쩌렁쩌렁 포효하는 듯
주변을 긴장하게 만들었던
그 우렁찬 목소리를
더 이상 들을래야
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아, 지금 돌이켜 보니
우리가 장군이한테
너무 몹쓸 짓을 저지른 게
아니었던가 싶어
생각할수록
후회막급(後悔莫及)입니다.
아파트로 이사온 뒤에
우리 장군이는
베란다(veranda) 한 구석에
보금자리를 틀었는데
다시는 예전처럼
대문을 지키지 않아도 되었고
다시는 대문을 사이에 두고
초딩 악동(惡童)들에게
시달리지 않아도 될 만큼
육신(肉身)은 편안해졌습니다만
제 목소리를 잃고 나서는
예전처럼 겅중겅중 뛰지도 않았고
벌렁 드러누워 애교를 부리거나
능청을 떠는 일이 점점 줄어들었으며
어느 날부터인가
베란다 한 구석에 엎드린 채
매일매일 낮잠만 쿨쿨 잤습니다.
그렇게 자다가도
우리 부부(夫婦)가 그 앞에 가면
벌떡 일어나
부동자세(不動姿勢)를 취한 채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던 우리 장군이가
어느 날부터는
앞다리를 절기 시작했고,
우리 부부가 그 앞에 다가가도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않았으며
주인 내외(主人內外)에게
꼬리 흔들 기운도 없는지
눈만 힘없이 치켜 뜨고
물끄러미 바라볼 뿐이었습니다.
생전(生前)에 주인(主人)에게
속 한 번 안 썩히던
우리 장군이었는데 말입니다.
동물병원에 데리고 갔더니
의사선생님 가라사대
우리 장군이가
몸에 종양(腫瘍)이 생겨서
그것도 간암(肝癌) 말기(末期)가 되어
더 이상 손 쓸 수가 없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무슨 청천벽력(靑天霹靂) 같은
말씀입니까.
바로 얼마 전에
‘심장사상충(心臟絲狀蟲)’ 검사
받으러 갔을 때만 해도
별 말씀이 없었는데
이제 와서
뜬금없이 간암에 걸렸다 하시니!……
아, 백인(伯仁)이 유아이사(由我而死)라.
이 마당에 누구를 원망하오리까.
우리 장군이와
열다섯 해나 함께 살았으면서도
반려 동물(伴侶動物)에 대한
기본 소양(基本素養)이 턱없이 부족했던
저희 탓이옵니다.
동물병원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집에 와서
제 아내는 더 이상
사료(飼料)를 안 먹으려는
장군이를 위해
생닭을 일곱 마리나 사다가
바로 엊그제까지
여섯 마리를 솥에다 푹 고아
먹였습니다.
처음엔 곧잘 받아먹더니
차츰차츰 음식을 거부하기에
닭고기를 잘게 썰고
그걸 다시 쥐어 짜
즙(汁)을 낸 뽀얀 국물과
황태(黃太) 끓인 물을
번갈아 먹이곤 했습니다.
나중에는 물도 안 마시려 해서
주사기(注射器)를 사다가
우리 장군이 입에
국물을 주입(注入)해
억지로 삼키게도 했지만
오늘 아침부터는
별무신통(別無神通)이었습니다.
속설(俗說)에 이르기를,
충견(忠犬)은 죽을 무렵에 이르게 되면
자기 주인에게 그 모습을 안 보이려고
자기 집을 탈출하거나 집안 구석진 곳에 가서
죽는다고 하였습니다
우리 장군이는 병원을 다녀온 이후
그 동안 지냈던 베란다에서
에어컨(Air conditioner)을 시원하게 켜 놓은
거실(居室)로 보금자리를 옮겨 지내게 하였는데
처음엔 시원해서
좋아하더니
결국 어제부터는 자기가 지내던
베란다 구석으로 가려고
몇 번 안간힘을 썼습니다만
기력이 없어
어쩔 수 없이
거실 바닥 카펫(carpet) 위에
엎드린 채 숨만 할딱거렸습니다.
오늘 아침엔 마지막으로
기력을 다해 몸을 일으키려 시도하였고,
식구들이 거실에서 나가
각자 자기 일을 하는 사이에
거실 한복판에 기어와
힘없이 눈을 치켜 뜬 채
때마침 서재(書齋)를 향해 가던
저를 바라보던 장군이는
저와의 눈맞춤[Eye contact]을
마지막으로
두 눈을 꼭 감은 채
우리 식구들이 다시 거실로
모여들기 직전까지
홀로 가냘프게 숨을 쉬다가
결국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먼 세상으로 훌쩍 떠나가 버렸습니다.
속설(俗說) 그대로
죽어가는 자신의 마지막 모습을
주인집 식구들에게 안 보이려고
마지막 안간힘을 쓰다가
우리 식구들이 자리를 비운 사이에
홀로 외로이 먼 길을 떠난 것입니다.
죽어가면서까지
자신과의 이별 장면을 주인에게
안 보이려 한
우리 장군이의 충심(忠心) 앞에
저절로 머리가 숙여집니다.
열다섯 해를 함께 살면서
늘 우리 식구들에게
기쁨과 위안을 한없이 주기만 했던
내 사랑 장군이!
우리 집 든든한 지킴이 장군(將軍)이가
중복(中伏)날인 오늘 낮 신시(辛時) 초(初)에
거실(居室)에서 혼자 운명했습니다.
2004년 4월 15일에 태어나
오늘 열다섯 살 나이로
고단한 삶을 마감한 것입니다.
사람들 나이로 치자면
거의 백수(白壽)를 누린 장군이었지만
막상 오늘 영결(永訣)하려니
가슴속 저 안에서 솟구쳐 오르는
슬픔을 자꾸만 느끼옵니다.
우리 장군이에게
살아 있을 때 좀 더 잘해 주지 못한 게
못내 후회스럽습니다.
너무나 착한 장군이,
사랑스러운 우리 장군이!!
평생 일편단심(一片丹心)으로
주인에게 충성을 다 바친 장군이었으니까
그 보답으로 우리 장군이는
좋은 세상으로 갔으리라 생각합니다.
하느님의 따뜻하신 보살핌을 입어
그곳에서도 사랑받는 장군이가 되길
간절히 기원하렵니다.
2018년 7월 27일 밤에
박 노 들
— 후기(後記) —
열다섯 해[滿14年] 동안이나 우리 집을 지켜 주던 반려견(伴侶犬) ‘장군이’가 오늘 오후에 우리 식구들 곁을 떠나갔습니다. 유한(有限)한 것이 생명체(生命體)라 언젠가 헤어질 것을 미리 짐작 못한 것은 아니지만, 막상 ‘장군이’가 곁을 떠나고 보니 그 상실감은 이루 말할 수 없이 크군요.
1940년대 후반기에 태어난 제가 초중고교와 대학교를 다니던 1950년대와 1960년대 시절에는 우리나라의 식량사정이 너무 열악(劣惡)해서 ‘이승만 대통령’ 정부(政府)부터 ‘박정희 대통령’의 정부에 이르기까지 역대 정부(歷代政府)는 해마다 대대적으로 ‘쥐 잡기 운동’을 전개했는데, 그 과정에서 쥐약을 먹고 죽는 견공(犬公)들이 부지기수(不知其數)였습니다. 그 당시(當時) 농촌에서는 두서너 집 건너 한 집씩 이른바 '잡견(雜犬)'에 속하는 강아지들을 키웠고, 그 주인들은 쥐약을 잘못 먹고 밤새도록 깨갱거리며 신음하다가 죽어가는 강아지들 때문에 온 집안 식구들이 고통을 받았답니다.
저 또한 강원도 시골 집에서 여러 차례에 걸쳐 검둥이ㆍ누렁이ㆍ흰둥이 강아지들을 잃는 아픔을 겪어서 두 번 다시 강아지를 키우지 않겠다고 굳게 결심했었는데, 그 결심은 결혼 이후 저의 아내와 아이들 때문에 지키지 못하게 되었고, 결국 이 번 장군이와의 이별까지 포함해 두 번이나 반려견(伴侶犬)을 잃는 아픔을 또 겪게 되었습니다.
십여 년 전에 입양(入養)해 기르던 개는 ‘스피츠(spitz)’ 종류의 흰둥이 암캐였는데 그 이름을 ‘예삐’라고 명명(命名)했을 만큼 아주 예뻤고 총명한 강아지였지만 15년 정도 우리와 함께 살다가 ‘심장사상충(心臟絲狀蟲)’에 걸려 죽었고, 이번에 우리 곁을 떠난 ‘장군이’는 ‘포메라니안(Pomeranian) / 스피츠(spitz)’ 계통의 피가 섞인 ‘믹스견[mix犬]’으로 무척 용맹하면서도 장난끼가 심한 수컷 강아지였는데, 처음 입양 당시에는 흰둥이 스피츠 ‘예삐’와 한 4~5년 정도 함께 살다가 ‘예삐’가 죽고 난 뒤에는 명실공히 우리 집 유일무이(唯一無二)한 수문장(守門將)으로써 지금껏 우리 내외와 아이들 셋의 사랑을 한 몸에 받으며 건강하게 잘 살아왔습니다.
견공들에 관한 기본 지식이 부족해 사랑스러운 ‘예삐’를 ‘심장사상충’에 걸려 죽게 한 전과(前科)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번에도 저희 집 식구들은 우리 장군이를 ‘예삐’처럼 잃지 않으려고 오직 ‘심장사상충병’ 예방에만 신경을 썼을 뿐 설마 우리 장군이가 ‘간암(肝癌)’ 따위에 걸려서 우리 곁을 떠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을 못 했기 때문에 결국 예상보다 빨리 장군이와 작별(作別)하게 되었습니다.
그래도 우리 부부가 애써 자위(自慰)하는 것은 ‘예삐’와 ‘장군이’ 두 마리의 반려견들이 우리 집에 들어와서 공(共)히 견공들의 나이로 환산해 거의 백수(白壽)의 삶을 누리며 우리 식구들과 기쁨을 주고받다가 저 세상으로 갔다는 사실입니다.
인간(人間)이든 비인간(非人間)이든 모든 생명체는 어차피 필수적으로 생로병사(生老病死)의 과정을 다 겪다가 어느 날 이 세상에서 사라져가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어린 시절 강원도에서 유소년기(幼少年期)를 보내고, 사춘기 시절에 상경(上京)하여 지금껏 살면서 여러 번째 반려견들과의 이별을 경험했습니다만, 이런 경험은 하면 할수록 마음이 담담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심리적 충격을 더 받게 되는 것 같습니다. 특히나 고희(古稀)의 나이를 넘기고 보니, 저도 현재의 건강 상태로 미루어 짐작하건대 이 세상과 작별할 날이 가까워 오는 것 같아, 오늘 우리 장군이의 주검 앞에서 저는 창피한 것도 모르고 눈물을 흘리면서 마지막으로 다시 결심했습니다. 다시는 정말 더 이상 우리 집에서 반려견을 기르지 않겠다고요.
오늘은 장군이를 제가 보냈지만, 현재의 제 나이로 미루어 보건대 만약에 또 반려견을 입양한다면 그리고 그 강아지가 앞으로 십오 년 정도 천수(天壽)를 누린다면 그때까지 제가 살아 있어야 하는데, 도저히 그럴 자신이 제게는 없습니다. 현재도 건강이 안 좋아 골골거리느라 자동차도 잘 못 타는 제가 어찌 90세 가까이 살 수 있단 말입니까. 제가 반려견을 두고 먼저 죽으면 그 가엾은 것은 어찌 혼자 살라고요?
아, 다시는 반려견과 이별하고 싶지 않습니다.
우리 장군이는 저의 생애(生涯)에서 마지막 반려견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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