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우리 집

친할머니 제삿날에

noddle0610 2018. 8. 18. 23:00






창작시조(創作時調)


친할머니 제삿날에


 



저에겐 친할머니 기억(記憶)이 하나도 없습니다.


왜정(倭政) 때 그 무더운 여름날 개울가에서


헉헉헉! 빨래하시다 돌아가신 얘기 밖에는…….


 

할머니 뵈온 적은 한번도 없었지만


마음씨 고우시고 용모(容貌)도 고우셨다는


어른들 말씀 듣고서 꿈속에서라도 뵙고 싶었습니다.


 

이름도 없으시고 사진(寫眞)도 없으시고


어여쁜 우리 할머니 산소(山所)조차 없으시니,


이 손주 울리시려고 그러셨나 봅니다.


 

할머니 잠드신 곳 이 세상엔 없더라도


이 손주 핏속에는 할머니가 살아계십니다.


할머니! 이 세상 미련 떨치시고 편히 쉬사이다.




2018 8 18(음력 7 9)


친손자  박  노  들  올림




◈ 덧붙이는 글


 저의 친할머님께옵서는 왜놈들이 이 땅에서 한창 악랄하게 극성(極盛)떨던 어느 해 여름에 향년(享年) 42세를 일기(一期)로 별세하셨습니다. 그 날이 바로 음력(陰曆) 7 9일이랍니다. 그래서 저희 집에서는 해마다 견우(牽牛)와 직녀(織女)가 만나는 음력 칠월(七月) 칠석(七夕) 다음 날이면 너무 이른 연세에 이 세상을 떠나신 할머님을 애틋한 마음으로 추모하며 정성껏 제사를 모시곤 합니다. 


저희 할머니께서 돌아가시던 해의 여름철 날씨도 요즘 우리나라 중부지방의 날씨처럼 폭염(暴炎)이 무척이나 기승을 부렸다고 합니다. 그 당시 우리 집안 대소가(大小家)는 대부분 강원도 춘천시(春川市)에 모여 살고 있었는데, 자녀를 무려 7남매나 두셨던 할머니께선 워낙 대식구(大食口)를 거느리고 사시느라 매일매일 빨랫감을 잔뜩 담은 함지박을 쪽 찐 머리 위에 이신 채 춘천시 외곽(外廓)에 있는 소양강(昭陽江) 강가로 가셔서 손빨래를 하시는 것이 하루 일과(日課) 중 가장 중요한 일이셨다고 합니다.


오늘날 같으면야 성능 좋은 전동(電動) 세탁기(洗濯機)의 도움을 받아 집안에서 편안히 빨래를 하면 되겠지만, 일제 시대(日帝時代) 당시에는 빈부(貧富)의 구별 없이 누구나 빨래는 일일이 손으로 직접 해야만 했으니, 저희 할머니의 노고(勞苦)가 얼마나 크셨겠습니까.


그 당시 저희 할아버님께서는 춘천 시내에서 가장 큰 비단(緋緞) 가게와 양조장(釀造場)을 동시에 경영하셨다고 하니, 저희 할머니께서 가정 형편이 어려워서 소양강 갯가에 가셔서 손빨래를 하신 것은 절대 아니었지요. 할아버지 할머니 양위분(兩位分)과 아들딸 일곱 남매(男妹)의 빨랫감은 물론이요, 가게 두 곳에서 일하는 남녀 일꾼들의 옷과 이부자리까지 도합(都合) 수십 명의 빨랫감을 감당하셔야 했으니, 그러지 않아도 식구들의 삼시(三時) 세끼 식사(食事)까지 하루도 빠지지 않고 면밀히 챙겨야 하는 주부(主婦)로서 저희 할머님의 하루하루는 실로 초인적(超人的) 노동(勞動)의 연속(連續)이었다고 할 수밖에 없겠습니다.


저희 할머니께서 돌아가시던 그날도 여느 날과 다름없이 할머니는 홀로 소양강 강가에서 빨래를 하셨는데, 결국 음력 7월의 뙤약볕을 견디지 못하시고 강가에 쓰러지셨고, 이내 동네 사람들에 의해 발견되긴 하셨지만 오늘날의 ‘119 구급대(救急隊)’와 같은 ‘사회(社會) 안전망(安全網)’ 시스템(system)이 제대로 구축되어 있지 않았던 시절이라 저희 할머니께옵서는 당신보다 세 살 연하(年下)이신 저희 할아버지와 일곱 남매를 남기신 채 이 세상을 뒤로 하시고 저 높은 하늘나라로 가셨습니다.  바로 그때 춘천 중앙소학교(中央小學校) 상급학년에 재학 중이던 저희 숙부(叔父), 그러니까 할머니의 막내 아드님이 때마침 학교를 마치고 소양강 강가를 배회하다가 수많은 사람들이 ‘짹변(개울가 또는 강가에 펼쳐진 자갈밭 : 강원도 영서지방 사투리)’에 모여 있는 것을 발견하였고, 그곳에서 저희 숙부님은 당신의 사랑하는 어머니께서 돌아가신 것을 알고는 당신 모친의 주검을 얼싸안은 채 떼굴떼굴 뒹굴며 문자(文字) 그대로 방성대곡(放聲大哭)했다고 합니다.


당시(當時), 할머니를 잃으신 저희 할아버님과 자녀분들의 충격은 이루 감당하기가 힘드셨을 것입니다. 왜정(倭政) 말기(末期)였기 때문에 시국(時局) 사정도 어려웠고, 할머니를 잃은 할아버지와 저희 집 식구들은 더 이상 춘천 시내에서 살아갈 의욕을 잃으셨기 때문에 일본(日本) 제국주의자들의 패망 직전(敗亡直前)에 춘천 시내의 가게와 공장(工場)을 다 정리하시고, 8.15 광복(光復) 무렵에 원래의 고향(故鄕)인 양구(楊口)-인제(麟蹄)의 접경 지역(接境地域)으로 귀향(歸鄕)하셨습니다.


할머니 돌아가신 후() 저희 집에 주부(主婦)가 안 계셔서였을까요? 그때부터 저희 집안에는 불행한 일만 연속적으로 일어났습니다.


할아버지 할머니의 자녀분들 일곱 남매 가운데 막내 아드님이신 저희 숙부님만 빼놓고 나머지 여섯 남매분들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대부분 병마(病魔)에 시달리거나 사고(事故)로 당신들의 어머님 뒤를 따라 이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6.25 한국전쟁이 끝난 직후 저희 고모(姑母) 두 분도 잇달아 몹쓸 병에 걸려 피접차(避接次) 친정(親庭)에 왔다가 너무 위독해지자 저희 할아버지께옵서는 시댁(媤宅)에 가서 그 집안 귀신이 되라며 돌려 보내셨고, 두 분 고모님은 모두 젊은 나이에 이승을 하직(下直)하셨습니다. 저는 큰고모님이 담가(擔架)에 실린 채 저희 집 문턱을 넘어 당신의 시댁으로 돌아가시던 마지막 날의 그 어두운 모습을 아직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 고모님이 남기신 유일한 혈육인 제 고종사촌(姑從四寸) 아우는 저와 동갑내기랍니다. 


저희 할아버지 할머니께옵서는 일곱 자녀를 대부분 일찍 여의셨지만 친손자(親孫子) 두 명에 친손녀(親孫女) 네 명, 외손자(外孫子) 한 명을 두셨습니다. 지금 이 세상에 할아버지 할머니의 일곱 자녀는 한 분도 안 계시지만 그 대신 일곱 명의 손자 손녀가 살아남아 있으니, 이 얼마나 오묘(奧妙)한 일입니까.


저희 할아버님의 회고(回顧)와 친척 어르신들의 회고에 의하면 저희 할머님은 참으로 인물이 고우셨다고 합니다. 그런 할머님을 여의셨기 때문인지 저희 할아버님께옵서는 재혼(再婚)을 안 하신 채 십여 년 이상 홀로 지내셨는데, 제가 춘성군(春城郡) 북산면(北山面)에 있던 ‘수산국민학교(水山國民學校)’에 입학할 무렵인 1954년에 저희 어머님이 강권(强勸)하셔서 억지로 재혼을 하셨습니다.


저희 아버지를 20대 초반 연세(年歲)에 잃으신 제 어머니께서 역시 독신(獨身)이신 시아버지를 한 집에 모시고 살기가 민망하니 반드시 재혼을 하셔야 하겠다며 주선을 하셔서, 어느 날 저희 집에 새할머니가 한 식구로 들어오시게 된 것입니다.


쪽 찐 머리에다 눈부시게 하얀 모시로 지은 한복(韓服)을 곱게 차려 입으시고 저희 집안으로 들어 오시던 새할머니의 그날 모습을 저는 아직껏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제 어머님은 참으로 효부(孝婦)이셨습니다. 이십 대 초반에 미망인(未亡人)이 되셨지만 당시 친정과 시댁 양가(兩家) 어르신들의 강력한 권유에도 불구하고 당신의 어린 아들 인생(人生)이 불행해질까 봐 재혼을 안 하시고 오히려 시아버님이신 저희 할아버님의 재혼을 주선하셨고, 그 후 두 분을 모신 채 홀로 이 외아들을 키우셨으니 말입니다.


 저희 친할머니 전주 이씨(全州李氏)를 사랑하셨고 그분을 못내 그리워하신 제 할아버지께서는 새할머니와 재혼 후에도 예전처럼 원래의 처가(妻家)인 전주 이씨 가문(家門)과 왕래를 계속하셨습니다. 새로 저희 집에 들어오신 단양 장씨(丹陽張氏) 할머니께서도 다행히 제 친할머니 친정을 당신의 친정처럼 여기시고 왕래를 하셨으며, 심지어는 제 친할머니의 친정 오라버니를 서슴지 않고 ‘오라버니’라 부르시면서 저의 친할머니 친정댁 식구들과 간친(懇親)하게 지내셨습니다.


 저 또한 친할머니의 친정, 즉 제게는 진외가(陳外家)집이 되는 전주 이씨 가문을 저희 외갓집보다 더 많이 드나들었습니다.


저의 어머니께선 저를 당신의 친정집에는 잘 보내지 않으셨습니다. 당신의 혼자 사는 모습을 친정 식구들에게 보이고 싶지 않으셨고, 혹시 외갓집 어른들이 저를 보시면 미망인이 되신 제 어머니 처지를 생각해 가슴 아파하며 (우리 어머니의 재혼에 장애가 되는) 나이 어린 저에게 혹여(或如) 이상한 말씀들을 하시지 않을까 염려하셨기 때문입니다. 그 대신에 저의 외갓집과 그리 멀지 않은 진외갓집(친할머니 친정집)에는 자주 저를 보내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외갓집 대신 진외갓집에는 자주 놀러 갔습니다. 제 외갓집과 진외갓집은 두 집 모두 우리 고향 마을에서 삼십 리 정도밖에 안 떨어진 ‘장사랑’이란 시적(詩的)인 이름을 지닌 동네에 자리 잡고 있었지만, 외갓집은 동네 안쪽 끝에 아주 깊숙이 떨어져 있었고 진외갓집은 동네 어귀에 있어서 제가 진외갓집을 살짝 다녀가도 그 사실을 저의 외갓댁에서는 전혀 모르셨습니다.  나중에 제가 대학생이 되고 난 이후에는 제 의지로 어머님 허락 없이 저의 외갓집도 드나들었고, 외사촌(外四寸) 동생과 외육촌(外六) 형제들과 교류(交流)도 빈번히 했었습니다만……. 


 여하튼 진외가(陳外家)에선 저를 보시면 모든 가족이 너무 반가워하시며 잘 대해 주셨습니다. 너무 일찍 전주 이씨 할머님이 돌아가신데다가 그분의 자녀들이 대부분 세상을 떠났음에도 불구하고 그 유일한 핏줄인 친손자(親孫子)가 가끔씩 찾아오니 반가울 수밖에 없었겠지요.


 제가 진외갓댁 식구들과 어느 정도 가까웠는가는 다음의 일화(逸話)로도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제가 서울에 올라와 유학 중(遊學中)이었던 1960년대 어느 해 2월 초에 조선 황실(朝鮮皇室)의 마지막 황후이신 순정효황후(純貞孝皇后) 윤씨(尹氏)께옵서 돌아가셨는데, 제 진외갓댁의 '전주 이씨' ()을 간직하신 어르신들은 황실(皇室) 종친(宗親)이시라서 거의 한 분도 빠짐없이 모두 상경(上京)하셔서 제가 자취(自炊)하던 집에서 저와 함께 머무르셨습니다. 어르신들께서는 국장(國葬) 기간 내내 매일매일 창덕궁(昌德宮) 낙선재(樂善齋)에 마련된 황후(皇后) 폐하(陛下)의 빈소(殯所) 오가시며 상제(喪制)로서의 역할들을 꼬박꼬박 수행(遂行)하셨습니다.


만약 제 친할머니께옵서 살아계셨다면 당신께옵서 손수 친정 식구들을 뒷바라지하셨겠지만 국장 기간(國葬期間) 내내 제가 친할머니를 대신해서 어르신들의 뒷바라지를 다했습니다. 그러는 동안에 저는 제 친할머니가 종친(宗親)이셨다는 사실에 새삼 자부심을 느끼곤 했지요. 


그러고 보니 제가 친할머님을 직접 뵈온 적은 없지만, 저희 진외갓집 어르신들의 용모를 기억해 본즉, 그분들은 한결 같이 ‘귀골(貴骨)’로 보일 만큼 잘 생기셨습니다. 황실(皇室)의 피가 몸속에 흐르고 있어서인지 눈매, 콧날, 피부색, 얼굴 윤곽 자체가 어디서나 돋보일 만큼 준수(俊秀)하셨으며, 비록 국운(國運)이 기울어서 부득이 종친(宗親)들이 흩어지고 그중 한 갈래가 한양(漢陽) 땅에서 강원도 산골 구석으로 낙향하여 삼 대(三代)째 정착 생활을 하며 농사일에 종사(從事)하고 있었지만 누가 보더라도 그분들의 외모(外貌)는 결코 촌부(村夫)의 투박스러운 모습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어쨌거나 종친(宗親) 전주 이씨 가문의 따님으로 태어나신 저희 친할머니께옵서는 일찍이 구한말(舊韓末)에 정삼품(正三品) 당상관(堂上官) 통정대부(通政大夫) 벼슬을 지내신 저희 고조부(高祖父)님 즉() ‘밀양(密陽) 박씨(朴氏) 가문’의 손자며느리로 출가(出嫁)를 하시게 되어, ‘기미독립선언(己未獨立宣言)’이 일어나기 바로 다섯 해 전인 1914년에 저희 집안으로 들어오셨지만 이미 저희 집안 역시 쇠락(衰落)해 가는 양반가(兩班家)였던 터라 우리 할머님의 신분은 더 이상 예전처럼 고귀할 수가 없었고, 유학자(儒學者)로서 밤낮 글만 읽으시던 저희 할아버님이 연암(燕岩) 박지원(朴趾源) 선생이 쓰신 ‘허생전(許生傳)’의 주인공 허생(許生)처럼 어느 날 돌연 학문(學問) 수업(修業)을 중단하시고 춘천시(春川市)로 가셔서 상업(商業)에 종사하시는 바람에 저희 할머니는 매일매일 강가에 나가셔서 수많은 식구들의 옷을 손수 세탁하셔야만 했던 것입니다.


 제 친할머니는 우리 집 호적(戶籍)에 당신의 이름이 없이 그저 '전주 이씨(全州李氏)'로만 등재(登載)되어 있습니다. 그 이유인즉슨 조선시대(朝鮮時代)의 여인들은 기생(妓生)이나 하녀(下女)들에게만 이름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당시 양반 여인들은 어릴 때는 '아기씨''아가씨'로 아랫사람들에게 불려졌고, 부모나 친척 어른들에게는 '아가''애기' 아니면, '첫째''둘째' 또는 일시적 아명(兒名)으로 불려지다가, 막상 성년이 되어 출가하면 아명은 사라지고, 그 대신 막연하게 '평산 신씨''밀양 박씨' 또는 '전주 이씨'로 족보(族譜)에 올라, 평생 '아무개 어머니' '아무개 부인'으로서 살아야 했습니다.  


저 유명한 율곡(栗谷) 선생의 어머니 신사임당(申思任堂)조차 평생을 이름 없는 여인(女人)으로 살아야 했습니다사임당은 그녀의 이름이 아니고, 시아버님이 며느리 신씨를 위해 지어 주신 별당(別堂)의 당호(堂號)였을 뿐, 그녀는 평생 '평산(平山) 신씨(申氏)'로만 지내야 했습니다.


‘의유당일기(意幽堂日記)’의 지은이라고 알려진 조선시대 양반 여성 연안 김씨(延安金氏)나 의령 남씨(宜寧南氏),  조침문(弔針文)’의 지은이로 알려진 유씨 부인(兪氏夫人), 또는 사도세자(思悼世子)의 부인(夫人)이자 정조(正祖) 임금의 어머니 ‘혜경궁 홍씨(惠慶宮洪氏)’ 같은 유명한 분들의 경우에도 당호(堂號)는 있었지만 이름은 따로 없어서 우리는 그분들을 그냥 ‘아무개 씨()’ 정도로만 부르고 있습지요.


이러저러한 사정으로 저희 친할머님께옵서는 대한제국(大韓帝國) 시절에 호적 제도(戶籍制度)가 생기면서 저희 할아버지 성명(姓名) 칸 옆에 ‘호주(戶主) 박모씨(朴某氏)의 처()’로 성함(姓銜)을 올릴 때 단순한 양반 여성이 아닌 종실녀(宗室女)이셨기 때문에 그냥 '전주 이씨(全州李氏)'로만 등재(登載)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저는 학창 시절에 '가정환경 조사서'를 작성하여 학교에 제출할 때, 조모(祖母)님 존함(尊銜)을 기록해야 하는 양식(樣式)의 빈 칸에 항상 '전주 이씨'라 써넣고는 무척 당혹스러워한 적이 여러 번 있습니다.


지금은 이 세상에 안 계신 할아버님께 어째서 친할머니의 이름이 없느냐고 따졌다가, 양반(兩班) 그것도 임금님과 친척인 종실(宗室) 여인에게는 원래 이름이 없다며 할아버님으로부터 한참 동안 지겨울 정도로 가문(家門) 자랑의 말씀만 들어야 했습니다. 하기는 요즘 여성들도 전업 주부(專業主婦)의 경우는 거의 본명(本名)이 없이 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요. 노상 '아무개 엄마' 아니면, '아무개 씨 부인'으로서만 살고 있지 않습니까.


 저는 분명 친할머니가 이 세상에 존재(存在)하셨음에도 불구하고 호적등본(戶籍謄本)에 ‘전주 이씨’로만 올려져 있기 때문에 그분의 이름을 예나 지금이나 모르고 있습니다. 요즘 유행하는 말로 ‘웃픈 일(웃기면서 슬픈 일)’이올시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저희 집안 선산(先山)에 친할머니의 산소(山所) 모셔져 있지 않습니다.


통정대부(通政大夫) 고조(高祖)할아버님과 숙부인(淑夫人) 고조할머님, 증조(曾祖)할아버님 양위분(兩位分), 그리고 제 친할아버님의 산소는 양지(陽地)바른 곳에 잘 모셔져 있지만 우리 친할머님의 산소는 선영(先塋)에 부재중(不在中)이십니다.


왜냐고요? 저희 할머니께서 돌아가실 때 저희 증조모(曾祖母)님 ‘청주 한씨(淸州韓氏)’ 할머님이 살아계셨는데, 당신의 시어머님 앞에서 며느님이 먼저 돌아가신 것은 불효(不孝)라 여겼기 때문에 당시의 관습상(慣習上) 선산에 모시지 못하고 화장(火葬) ()에 산골(散骨 : 산이나 강에 뿌리는 일)을 하셨다는 것입니다.  저는 수만 평()에 이르는 선산을 놓아 두고 할머님을 ‘산골’할 때 저희 할아버님이나 저희 아버님 형제자매들의 당시(當時) 심정은 어떠했을지 그게 자못 궁금합니다.


저희 할머님이 돌아가시고 나서 바로 그 다음 해 여름에 저희 증조할머님이 돌아가셨는데, 그날이 하필이면 저희 할머님이 돌아가신 음력 7 9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저희 증조할머님과 친할머님은 제삿날도 두 분이 똑같이 칠석(七夕) 다음 날인 음력 7 8일이랍니다. 바로 오늘 저녁이지요.


저희 집안 대소가(大小家) 친척이 모두 한 마을에서 집성촌(集姓村)을 이루어서 살 적에는 저희 증조모님과 제 친할머님 두 분을 함께 한 장소에서 연()이어 제사를 지냈는데, ‘소양강 댐(dam)’의 준공(竣工)으로 고향 마을이 수몰(水沒)되고 나서는 증조모님은 종갓집에서 제사를 지내고 친할머님 제사는 지금껏 제가 홀로 모시고 있습니다.


세상에!…… 시어머니와 며느리 두 분의 제삿날이 동일한 날이 될 줄 그 누가 미리 짐작이나 했겠습니까. 생각할수록 짠하게 ‘웃픈 일’이올시다.


 저희 집안보다 훨씬 지체 높은 명문(名門) 집안에 태어나셔서 우리 집안으로 시집 오신 후 무려 일곱 남매의 자제분들을 생산(生産)하셨지만 저의 친할머님은 돌아가신 후에 그 영혼이 편(便)치 않으셨을 것 같습니다


일곱 자녀 중에 막내 아드님을 제외하고는 여섯 자녀분들이 모두 천수(天壽)를 누리지 못하고 이 세상을 등지셨으니까요.


그래도 친손자(親孫子) 두 명에 친손녀(親孫女) 네 명, 외손자(外孫子) 한 명을 두셨으니, 할머니께서는 하늘나라에서 일곱 명의 손자 손녀들을 내려다 보시고 당신 스스로를 위로하셨으면 합니다.


 이름도 없으시고 사진(寫眞)도 없으시고 산소조차 없으신 우리 할머니!


우리 할머님의 일생(一生)은 무척 짧으셨지만 “세라비, 이것이 인생! C'est la vie!”이란 영화(映畵) 제목이 의미하는 그대로 최근세(最近世) 우리나라 여성들의 비극적(悲劇的) 삶을 상징하는 듯 정말로 파란곡절(波瀾曲折)이 많으셨습니다.


하오나 우리 할머님을 단 한 번도 직접 뵌 적은 없지만 지금 이 순간 할머님은 저의 몸속에 제 핏속에 아주 뜨겁고 생생하게 살아 계시오니, 이름도 사진(寫眞)도 없고 산소조차 없다 하시며 너무 섭섭히 여기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할머니의 유전자(遺傳子), 다시 말해 할머님 특유의 디엔에이(DNA)가 이 손자의 몸속에 핏줄 속에 힘차게 흐르고 약동(躍動)하는 한(), 할머님은 충분히 이 세상에 오신 보람이 있으신 것입니다.  


그런즉 제 친할머님 영혼이 하늘나라에 진짜 계시다면 이 세상에 대한 '()' '미련(未練)' 따위는 이제 다 떨쳐 버리시고 오늘부터라도 그곳에서 편히 쉬시면 정말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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