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우리 집

감자[甘藷] 앞에서

noddle0610 2019. 7. 1. 02:30














감자[甘藷] 앞에서



육이오(六二五) 사변(事變) 이후 강원도(江原道)에 돌아오니

서너 해 난리(亂離) 통에 남은 게 하나도 없었다.

먹을 게 너무 없어서 삼시(三時) 세끼 감자만 먹었다.


 

사방에 불발탄(不發彈)이 지천(至賤)으로 깔려 있어

논농사 밭농사를 지을 수 없었기에

터앝에 감자만 심어 삼시 세끼 감자만 먹었다 



전쟁은 끝났어도 식량난(食糧難)은 안 끝나서

차라리 피난지(避難地)서 배급(配給) 타 먹던 시절이 그리웠다.

아침도 감자밥이요 저녁도 감자밥이니 더 말해서 뭣하랴.



철없는 어린애는 감자밥 안 먹겠다며

섬돌에 벌렁 누워 투정을 부리다가

아야얏! ‘어머이’ 한테 회초리로 피멍 들게 맞았다 



쌍팔년(雙八年) 즈음에야 공병대(工兵隊) 도움 받아

불발탄 다 없애고 흰쌀밥을 먹었는데

그 뒤로 십 수 년 동안 감자밥은 거들떠보지 않았다.



누군가 날 가리켜 ‘감자바위’라 놀려대면

짱돌을 집어 들어 무조건 혼내 줬다.

‘산비탈’ 출신이라며 놀려대면 몽둥이로 혼내 줬다 



육이오 끝나고서 여러 해 맛본 감자 맛이

장가(丈家)를 들 때까지 삼십 년(三十年) 동안 살아남아

첫날밤 색시에게 한 말이 감자는 밥상에 올리지 말라는 거였다 



어릴 때 질리도록 먹은 게 감자밥과 번데기라

우리 집 밥상에는 감자와 번데기가 올라올 리 없건만

내 나이 일흔 살 넘어 지금은 찐 감자를 먹을 때도 종종 있다

 


감자밥 안 먹겠다 투정을 부리다가

‘어머이’ 회초리에 피멍 들게 매 맞은 일이

아련히 기억이 날 때 찐 감자를 종종 먹는다.



철부지 외아들을 회초리로 때리시곤

치마 끝 슬쩍 들어 눈물을 훔치시던

‘어머이’ 그분 생각나 감자밥도 종종 먹는다

 


육이오 끝나고서 질리게 먹은 그 음식,

그 뒤론 안 먹었던 찐 감자와 감자밥을

일흔 살 넘기고 먹는 까닭은 ‘우리 어머이’가 보고파서다

 


2019 6 30

     



1) 어머이 : 강원도 영서 지방(嶺西地方)에서 쓰는 ‘어머니’의 사투리.


2) 쌍팔년(雙八年) : 단기(檀紀) 4288년을 가리키는 말이다. 7080 세대들에게 ‘쌍팔년(雙八年)’은 단기 4288, 그러니까 서기(西紀) 1955년을 의미하는 말이다. 그러나 오늘날 이른바 ‘586세대’를 포함한 5060 세대들에게 ‘쌍팔년(雙八年)’은 ‘88 서울 올림픽’이 열렸던 서기(西紀) 1988년을 의미하는 낱말이다.


3) 감자바위 : 감자가 많이 나는 강원도 지역이나 그 출신 사람을 낮잡아 이르는 말. ‘감재바우감자바위의 강원도 방언(方言)이다.


4) 산비탈 : 대체(大體)산기슭의 비탈진 땅이 많은 강원도 지방 또는 그 고장 출신 사람을 낮잡아 이르는 말. 주로 제1~3공화국 시절의 군대와 학교에서 많이 쓰던 말이었으며, 바로 이 산비탈2음절로 줄여 비탈이라고 낮추어 말하기도 하였다 




< 후기(後記)>

 

손위 처형(妻兄)이 전라남도 진도(珍島)에 사는 당신의 사돈집에서 보낸 것이라며 저희 집에 감자를 한 포대(包袋)나 전해 주셨습니다.


우리 고향 강원도(江原道) 감자보다는 평균적으로 크기도 작게 보였고, 맛도 ‘강원도 감자’에 비해 덜 맛있었지만, 바다 한가운데 있는 섬에서 생산된 감자이기에 호기심으로 ‘찐 감자’ 4개를 먹었습니다.


아내와 함께 감자를 먹으며 저는 어느새 지금으로부터 65년 전() 휴전회담(休戰會談) 다음해에 피난지(避難地)에서 돌아와 삼시 세끼 감자만 먹어야 했던 시절을 떠올리며, 일찍 돌아가신 저희 어머니 생각이 나서 목이 메어 아주 혼났습니다. [.]

 

2019 6월 그믐날 밤에